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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잡글쓰기

거리 조정


베스트 셀러인 <미움받을 용기>에 나오는 말 :
"책을 읽을 때, 책에 얼굴을 너무 가까이 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겠지? 마찬가지로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으려면 어느 정도 거리가 필요하네. 거리가 너무 가까우면 상대와 마주보고 얘기조차 할 수 없네. 그렇다고 거리가 너무 멀어서도 안 돼.(...)그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네."


무위감에 저항이라도 하듯, 책 한 권을 손에 잡아 읽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새삼 내 눈의 수정체가 백내장 수술에 의한 인공물이라는 걸 인식한다. 문득 예전에 안경점 사장님께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백내장이 있으시다고요? 심하지 않으면 가급적 수술은 미뤄 두세요." 나는 이 조언을 수술 후에나 경험으로 이해했다. 인공수정체에는 '줌 인/줌 아웃'기능이 결여되어 있다. 예컨대 책을 읽을 때 적정 거리에서는 글자가 선명하지만, 적정 거리를 벗어나 아주 조금이라도 지면과 가까워지거나 멀어지게 되면 글자는 흐릿해지기 시작한다.


따라서 안경도 두 개를 지니고 다닐 수밖에 없다. 하나는 원거리용이고 또 하나는 근거리용이다. 전자는 운전할 때 사용하고, 후자는 컴퓨터의 모니터를 볼 때 사용한다. 운전할 때 사용하는 원거리용 안경은 먼 거리의 시야 확보에 도움은 되지만, 계기판이 잘 보이지 않아 의도치 않게 과속을 하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요즘 이런 망상에 빠져있다. '적정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인공수정체처럼, 관계에 있어 '적정 거리'를 유지하게 할 수밖에 없는 '인공 마음'의 이식이 백내장 수술처럼 가능할 수는 없을까? 안다.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생각이라는 것쯤은.


멍청한 생각을 유도한 원인이 무엇이든, 감정의 여러 아픔들 중에서는 '거리 조정 실패'에 따른 후회와 회한이 포함될 것이다. 구태여 문학적 용어로 남용하자면 '부족한 거리 조정(Under-distancing)'이나 '초과한 거리 조정(Over-distancing)'으로 인한.
관계의 아픔은 항상 이들 중의 하나가 원인이 되어 찾아든다. 경험상 '초과한 거리 조정'으로 인한 이별이 한층 더 쓰라리다. 아마도 그래서 기형도 시인은 이렇게 썼던 것일 테다.


그날 마구 비틀거리는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너무도 가까운 거리가 나를 안심시켰네
(...)
-<그집 앞>


한동안 원거리용 안경을 쓰고 다녀야 할 것 같다.




                                               기형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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