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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리뷰

여자의 일생

 

 

어린 시절에 가장 하기 싫었던 숙제들 중 으뜸인 것은 악보 그리기였다. 오선 중 어딘가에 걸려있는 음표의 계이름을 빨리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므로(가온 '다'음에서 계단을 밟듯이 천천히 세어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피아노를 배워 독보가 빠른 급우들에 비해 실행이 느리고 지난할 수밖에 없었는데, 어떤 때는 베껴야 할 원본 악보를 무시한 채 내 마음대로 아무 칸에 음표를 그려넣은 적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악보 그리는 게 업이 되었다. 어쩌면 과거의 잔꾀에의 대가를 치루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다음으로 하기 싫었던 숙제는 독후감이었다. 사실 당시의 수준으로 독후감이라 봤자 해당 텍스트의 내용을 요약하는 정도이거나 개인의 소감으로 '착한 삶을 살아야겠다'거나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 정도가 고작이었을 터라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텐데 왠지 다른 숙제보다 더 귀찮았던 것 같다.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독서 감상문이란 여전히 참으로 귀찮은 일이다.

 

오늘 언급할 작품은 자연주의 작가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 1850~1893)의 <여자의 일생(Une Vie)>이다.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라 새삼 소개할 것까지도 없지만, 역시나 "'고전'이란 한번쯤 읽기를 바라지만 사실은 아무도 읽고 싶어하지 않는 책.”이라는 마크 트웨인의 얘기도 있고 하니 작금에 고전을 말하는 것도 그다지 뒷북 칠 일은 아닐 터이다.

19세기 판 '사랑과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여자의 일생>의 대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수도원에서 교육을 마치고 귀향한 주인공 잔은 그녀의 자연친화적인 성향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바다가 인접한 레 푀플의 별장으로 부모님과 함께 이사를 떠난다. 그곳에서 만난 줄리앙 라마르 자작의 구혼에 응하여 결혼하지만, 행복에의 애초의 희망은 줄리앙의 바람기와 냉대로 점차 얼어붙어만 간다. 하녀를 임신하게 한 뒤 수습을 위해 얼마의 땅을 주고 집에서 내보낸 줄리앙은 이후 어느 이웃의 귀족 부인과 정분을 통하게 되고, 그 사실을 알게된 부인의 남편에 의해 살해당한다. 한편 오랫동안 지병을 앓고 있었던 어머니도 비슷한 시기에 숨을 거두게 되고, 생전에 어머니가 옛 추억을 더듬듯 되풀이해 읽곤 하던 편지를 발견한 잔은 편지의 진실을 알게 되어 망연자실하게 된다. 몇년의 세월이 흐른 뒤 자신과 유일한 아들을 돌보아주던 이모와 아버지가 사망하게 되어 홀로 남게 된 잔은 아들 폴에게 인생의 모든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그러나 인생은 그러한 그녀의 기대를 배반하는데

보다 자세한 줄거리는 여기를 참조하라.
http://piju00.blog.me/50077858540

 

이 줄거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녀의 인생은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

 

 

 

 

문학 평론가 이춘복(李春馥)의 평론을 보자.

모파상은 졸라와 함께 프랑스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였다. 그의 문체는 스승 플로베르의 영향을 받아 명석하고 간결하며, 사실 묘사에 있어서 적확하고 탁월한 작가의 통찰력을 보였다. 또한 모파상의 문학은 결정론적인 인간관에서 오는 짙은 염세주의(pessimism)의 근저 위에 구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여자의 일생>의 한 대목을 보자.

"인생이란 항상 즐거운 것은 아닌가 봐요."
남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할 수 없는 거야. 얘야. 우린 어떻게 할 수 없단다."

 

인간의 삶이 결정되어 있다는 것은, 단순하게 말하자면 인간의 삶은 내 의지로 온전히 이끌어갈 수 없는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이라는 거다. 결정론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은 견해는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헛소리가 된다.

 

 

 

 

 

 

 

                                                                 김성모 作, <돌아온 럭키짱>중에서

 


'세상의 관점으로 제 아무리 성공한 인간이나 천하다는 인간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 자체 개개인의 능력은 대충 비슷하다'는 위 견해는, 일단 '성공한 인간'의 대척으로 '천하다는 인간'을 놓았다는 것 자체가 사려 깊지 못함을 드러낼 뿐이다. '천하다'의 대척은 '고귀하다'이지, '성공하다'가 아니다. 그러나 이런 건 일단 넘어가기로 하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노력을 좀 더 많이 한 자가 성공한다'는 것인데, 이 얘기를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노력을 안 했거나 아니면 덜 한 사람들'이라는 얘기일 거다.

사실 이 견해는 겉만 그럴싸하지 실제로는 어떠한 유익한 정보도 없는 허언에 불과하다.  '성공'에 대해서 얘기하려면 먼저 '성공'이란 개념에 대해 정의를 내려야 한다. 원래 시인이 꿈이었던 자가 사업을 해서 억만장자가 되었다면 이 삶은 성공한 삶인가? 혹은 불후의 명작을 토해 낸 알거지 시인의 삶은 성공적인가? 적어도 위 만화의 장면으로 한정하자면 작가는 부의 축적을 성공한 삶의 척도로 삼고 있는 듯하다.

 

어쨌거나 일단 세속이 평가하는대로 '성공'을 부의 축적의 정도에 따라 가늠할 수 있는 것이라고 정의해 보자. 그러면 노력을 더 많이 한 자가 성공한다는 얘기는 수긍할 수 있는 가치가 있는 걸까? 세상에는 열심히 했으나 일이 꼬이고 꼬여서 쫄딱 망해버린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를 구태여 들어가며 반박할 생각은 없다. 구조적 불평등에 관해 얘기할 생각도 없다. 다만 이 점은 되묻고 싶다. 어떤 사람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즉 가난하게 살고 있다면 이유는 무엇인가? 성공한(부유한) 사람이 성공한 이유가 그의 노력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같은 논리를 적용하여 성공하지 못한(가난한) 사람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그의 부족한 노력 탓이라고 말할 거다.

 

노력 여하에 따라 성패가 결정된다는 견해는 참으로 명쾌하게 들리기는 한다. 사회적 불평등의 구조나 태생적 능력의 차이를 직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견해만큼 지당하게 들리는 것도 없을 테다. 하지만 이 견해는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허언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이 성공하지 못한(가난한) 이유가 그의 부족한 노력 탓이라면, 성공하지 못한 사람 정도가 아니라 흔히 말하는대로 (물질적 소유 정도에 따르는 서열의) 바닥에 있는 소위 '루저'들이 그렇게 된 데에는 소위 '위너'나 성공은 못했지만 그럭저럭 사는 사람들에 비해 턱없이 노력을 안 했기 때문이라는 논리가 된다. 한마디로 게을러터졌기 때문이라는 거다.

 

그렇다면 위 작가와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들 루저들은 대체 '왜' 게을러터졌는가? 노력 여하에 따라 미래의 생활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 자명함에도 왜 그들은 게으른 삶을 살았을까? 그러면 아마도 이런 답변이 돌아오리라. '그들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고통을 감내하는 대신 당장 즐거운 대상을 쫒아 오로지 삶을 낭비했기 때문'이라고. 답변이 충분한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렇게 되물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위너처럼 현재의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고 당장의 쾌락을 주는 대상들만 쫒았는가?' 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답변하리라. '그들 루저들은 인내력이 약했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는 이렇게 되묻는다. '왜 그들 루저들은 인내력이 약한가? 그들의 인내력을 약하게 만든 요인은 무엇이었는가?'

 

이쯤되면 왜 허언이 될 수밖에 없는지 이해할 수 있다. 실패의 원인을 노력의 부족으로 단정하여 결론을 내리는 것은 한정적인 답변이 될 수밖에 없다. 어떤 결과에 대한 원인을 깊이 추궁할 여력이 안되니까 그것들을 외면한 채 피상적인 답변으로 한정하려는 것뿐이다.

피상적인 이해는 무지이기 이전에 타인에 관한 무관심에 불과하다. 예컨대 후배 K군이 당신에게 사소한 문제로 언쟁을하는 도중 공격적인 언사를 드러냈다고 치자. K가 당신에게 그러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자식은 원래 싸가지가 없기 때문'이라고 결론 지으면 일면 후련하기는 하지만 심층적 진실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고대 로마의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동정이란 현재 눈 앞에 있는 결과에 대한 정신적 반응이고, 그 결과를 낳은 요인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 빈면에 관용은 그것을 낳은 요인까지 고려하는 정신적 반응이라는 점에서, 지성과도 안벽하게 공존할 수 있다."

 

 

 

 

제 아무리 열심히 산 인간일지라도 타자와 사회적 관계를 맺는 한, 그 타자는 얼마든지 자신을 삼키는 폭탄이 될 가능성도 있다. 제 아무리 '사람을 봐 가며' 친분을 쌓는다 하더라도 운명이 날리는 크로스카운터에 떡실신이 되는 일은 부지기수다. 예컨대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고 파악하여 가까이 지낸 A의 후배가 어느날 전혀 예상치 못한 외부 요인으로 인해 파산하여 A에게 막대한 부채에 대한 보증을 서 줄 것을 요청했고, 그 요청에 응한 A는 결국 같은 운명에 처해졌다고 가정해 보자. 성실한 A가 실패한 원인은 무엇인가?

 

무분별한 온정주의 때문이라고 누군가가 지적했다면,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성실한 A가 온정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조상의 내력인가? 아니면 어렸을 적 타인에게 인정을 베풀라고 가르친 그의 부모 탓인가? 그도 아니면 인정머리 없음을 부덕으로 간주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종합되어 저장된 무의식적 소산인가?
(물론 심층적인 원인을 알기란 참으로 지난하다. A 자신이 그나마 잘 파악할 수 있겠지만, 아마도 그조차 심층적인 원인을 온전히 들여다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형식적 외피의 배후를 투시하여 추적려는 태도는 표면적 사실을 부동의 진실로 단순하게 고정시키려는 완고한 태도보다는 얼마나 인간적인가.)

 

그리고 이 점을 묻지 않을 수 없다. A는 그 후배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성공한 삶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었을 거다. 대체 왜 그는 그러한 인연을 맺게 되었는가? 이러한 인연도 필연인가? 결정론을 배제하고 '우연'의 관점으로 보자.
문득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7년 전 '우연히' 테레사가 살았던 도시의 병원에서 복잡한 뇌병 케이스가 하나 나타났다. 그래서 토마스의 과장(의사) 선생님은 급한 대진 부탁을 받았다. '우연히도' 그때 과장 선생은 좌골신경통을 앓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토마스를 대리로 그곳 지방 병원으로 보냈다. 그 도시에는 다섯 개의 호텔이 있었다. 그런데 토마스는 '우연히도' 테레사가 일하고 있던 곳에서 내렸다. '우연히도' 그에게는 기차가 출발하기 전 다소의 시간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어느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테레사가 '우연히도' 일하는 시간이었고 '우연히도' 그가 앉은 식탁의 시중을 들었다. 따라서, 마치 토마스 자신이 전혀 그녀에게 가려하지 아니한 것처럼, 그를 그녀에게로 밀치기 위해서는 여섯 번의 우연이 필요했다.

(중략)

오직 우연만이 메시지로서 이해될 수 있다. 필연성에서 발생하는 것, 예측할 수 있는 것, 매일 반복하는 것에는 메시지가 없다.

 

어디 여섯 번 뿐이었겠는가. 위의 소설에 따르면,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데는 무수한 우연의 발생이 전제되어야 한다. 생각해 보면 한 인간의 성격이나 성향이 결정되는 것에 그 부모의 유전자가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런데 그 부모의 만남 또한 우연의 산물이지 않은가? 한 인간이 유별나게 게으르거나  온정적인 것을 유전적인 그 무엇으로 파악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결국 이러한 타자들간의 우연적 마주침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유전자(a)와 어떤 유전자(b)가 만나서 결합하여 이러이러한 유전자(a+b)가 생성되었다고 설명해봤자 최초 만남의 근원적 원인까지 파악할 수는 없다. 노사연이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하고 노래해 봤자 이 얘기는 결국 여러가지 우연의 축적을 필연이라고 믿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머피의 법칙'과 유사하다. 도서관에 가려고 할 때마다 꼭 간발의 차이로 버스를 놓친다. '~때마다'라는 생각은 버스를 놓치지 않았던 무수한 순간들을 망각한 결과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어쩐지 게으름이나 불성실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희석시키려는 듯이 보인다. "우리 세대의 최대의 발견은, 인간은 정신 세계를 바꿈으로써 그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한 철학자도 있다. 자유의지는 가능할까? 잘 모르겠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이것 뿐이다. 불가항력의 결정론적인 것들, 혹은 그 반대로 우연은 확실히 존재한다. 따라서 노력 여하에 따라 순위가 정해진다는 건 순진한 발상이다. 야구의 경우 4번 타자보다 노력을 덜 해서 8번이나 9번 타자로 배정된 건 아니다. 재능은 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낙오된 선수들을 모아 '외인구단'을 만들어 무인도에서 생사를 건 지옥 훈련을 시켰기 때문에 100%의 승률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창출했다는 건 명랑만화에서나 가능한 얘기다.

 

다시 우연이 아닌 결정론적 관점에서 보자.  "(인간이 자율적인 존재라는) 가상에서 벗어나 주체의 근원적 타율성을 적합하게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해방의 참된 조건"이라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빗대어 말하자면,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해 온갖 노력을 경주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성공이라는 열매로 보답 받으리라는 자명성 따위는 애초에 없다고(혹은 알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이 정신의 해방에 좋다는 거다. <청춘의 문>의 작가 이츠키 히로유키가 저서 <타력(他力)>에서 말하고자 한 바도 아마 이런 비슷한 것이리라. '타력'이란 것이 결정론적 필연의 산물인지, 아니면 우연의 산물인지는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다.

나 혼자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큰 사회적 변동이나 시대의 흐름 앞에서는 거의 무력하다고, 어딘가 몸 속 깊은 곳에서 느끼고 있는 듯합니다.

안 되는 건 안 되고, 못하는 건 못한다, 개인의 노력이나 선의도 보답 받지 못할 때는 보답 받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그런 경우가 많은 게 인간세상이다, 라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조용히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략)
노력이 보답 받는 일 또한 드물게 있습니다. 아주 드물긴 하지만, 분명히 있긴 있습니다. 노력이 헛되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건 이 세상에서 몹시 보기 드문,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기적 같은 사건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그 이상은 아닙니다.(…)노력이 보답 받는 경우는 거의 드뭅니다.
(중략)
"내 소관이 아니다."
이 말이 제 머릿속에 항상 메아리 치며 사라지지 않습니다.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라고 생각하고, '하지만 저절로 꼭 되어야 하는 방향으로 될 것이다'라고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디서부터인가 불가사의한 안도감이 찾아오는 것을 느낍니다.
(중략)
타력(他力)에 대해 설명할 때 저는 종종 나룻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엔진이 달려 있지 않은 나룻배는 바람이 전혀 불지 않는 상태에서는 달릴 수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바람이 불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산들바람조차 불지 않는다면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룻배 위에서 아무리 애써봤자 헛수고입니다. 타력의 바람이 불지 않으면 사실 우리의 일상도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법입니다.

병과 싸우겠다고 아무리 결의해봤자 좀처럼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어왔을 때 나룻배의 돛을 내리고 앉아서 졸고 있다면 달릴 기회도 놓치게 됩니다. 따라서 바람이 불지 않는 상태가 아무리 계속돼도 꾹 참으며 주의 깊게 바람이 불 낌새를 기다리고, 하늘을 살피고, 또 바람을 기다리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노력을 '자력(自力)'이라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의 자력도 필요한 셈입니다. 그러나 최근에서야 겨우 납득할 수 있게 되었는데, 바로 그 '자력'으로 보이는 노력도 사실은 '타력'이 작용한 게 아닐까요.

바람이 없어도 굴하지 않고 가만히 바람을 기다리며 언제라도 바람에 대응하는 긴장감, 그 노력을 사공에게 부여하고 '언젠가 바람은 불어온다'라는 강한 신념을 지속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타력'의 작용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것, 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마음이 절로 들게 하는 불가사의한 힘, 그것이 바로 '타력'의 작용의 본질인 것입니다.
저는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을 '진인사즉천명(盡人事卽天命)'이라는 식으로 임의대로 읽고 있습니다. '천명'을 '타력'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필사적으로 최선을 다하자고 결의하고 그것을 완수한다, 그것이야말로 '타력'의 후원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이츠키 히로유키 著, <타력>중에서

 

 



 

모파상은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한 인생(잔느의 인생)의 비참을 과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모파상의 속내는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삶이란 지뢰밭 가로질러 건너기다. 만일 네가 운이 좋다면 요행히 무사히 건너편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인생은 아름답다고 쉽게 말하지 말라. 그것은 주변의 흔하디흔한 참혹한 상황을 보지 못하는 윤리적 불감증이나, 아니면 근거 없는 낙관주의에 불과하다. 볼테르의 말마따나 '낙관주의란 나쁜데도 불구하고 좋다고 우기는 것'이 아닌가?
대체로 그렇듯이 더럽게 운이 없다면 M16대인지뢰를 밟아 폭사할
 것이고, 그보다는 운이 낫다면 M14발목지뢰 정도만 밟아 불구가 되는 정도에 그칠 것이다. 후자의 경우, 불구에 대한 보상을 너 자신이 아닌 타 존재에게서 구하지 마라. 네가 방패라고 믿은 그것은 어느 순간 부비트랩으로 변모할는지도 모른다.  C`est la Vie.


이런 반문이 예상된다. 세상에 대한 염세적 관점은 일면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은 오로지 비참한 것만은 아니다, 라는.

문득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주인공 '영호(설경구 분)'는 우연히 고기집에서 예전에 자신이 형사였던 시절에 고문했던 이(과거에 운동권 학생이었다)와 조우하게 된다. 화장실에서 대면하는 순간 문득 운동권 학생이던 시절에 남긴 그의 수기의 한 대목인 '인생은 아름답다'는 구절을 생각해 내고는, 그에게 빈정거리며 말을 건낸다.

 

"아직도 인생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세요?"

 

아주 오래 전에, 연인이고자 했으나 결국은 제 욕망의 크기만 확인한 채 결별 이후의 집착에서 허우적이던 때, 역시나 집착의 또다른 형식에 불과했을 편지를 밤 늦은 시각에 공들여 쓴 적이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 잊어버렸지만, 대충 이런 오글거리는 내용만은 기억하고 있다.

 

'만일 삶의 지뢰를 밟게 되더라도모든 것은 다 지나가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삶의 지뢰'라니, 참으로 우아하지 못한 표현도 표현이지만, 이건 대놓고 지뢰를 밟을 것이라는 저주처럼 보이지 않겠는가. 아무리 '만일'이라는 단서를 붙였다손 쳐도.

생각해 보면 이것은 당시의 내가 내 자신에게 한 얘기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지만,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삶의 길목 도처에 숨어있어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들만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염세주의 철학의 영향 때문인지, 아니면 그런 성향이 염세주의 철학을 좋아하게 만들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행인임발우개봉의 절차를 거칠 것도 없이 그 편지는 부쳐지지 않았다. 아마도 뒷북치기의 우아하지 못함, 혹은 닭 쫓던 개 지붕 응시의 꼴사나움을 간파한 탓이었을 테다.)

 

 

 

 

'인생은 아름답다.' 이상한 말이다. 원래 인생은 미적 평가의 대상이 아니니까. 고로 이 말은 '인생은 행복하다'는 말의 은유로 받아들여야 한다. '인생은 행복하다'는 말 자체도 해석이 용이하지는 않다. '행복'이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골치 아프니까 구체적인 논의는 생략한 채 그냥 두루뭉술한 채로 이해하고 넘어가자. '인생은 행복하다'라는 말에 대해 '그런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다'는 식으로 역시나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는 건 조금 성의가 없어 보인다. 모파상이라면 이렇게 답변하리라. "전쟁, (지진이나 해일 등의)자연재해(그리고 그로 인한 기아), 범죄, 질병,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온갖 비참함…, 인생의 길목 도처에 지뢰가 깔려있다. 만일 팔순(혹은 그 이상)의 나이에 이르러 생을 다하게 될 때 별다른 폭탄이 터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인생이 본래 행복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운이 좋은 탓이거나 혹은 그 인생은 그렇게 결정되었을 뿐이다."

작금의 나는 이츠키 히로유키의 다음의 글이 와닿는다.


지금의 중학생, 고등학생에게 '인생은 기쁨과 희망에 가득 차 있다'라고 해봤자 아마 전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인생은 스스로 내던질 만큼 지독하진 않아'라고 하는 게 그나마 와 닿을지도 모릅니다.
(중략)

이 세상은 새가 울고 꽃이 피는 낙원이 아니라 괴로움과 절망, 좌절의 연속입니다. 사람은 울면서 태어납니다.
'모든 것에 기대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각오를 굳히는 게 좋을 것입니다. 만일 그때 의외의 소통이나 공감과 조우하게 된다면 그것은 기적적인 일이라 여기고 감격하면 됩니다.

 

 

                                           Guy de Maupassant(1850~1893)

 

 

 

소설 <여자의 일생>은 주인공 잔의 여종인 로잘리의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난다.

"인생이란 보시다시피 그렇게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가 봅니다."

 

로잘리가 이런 얘기를 한 맥락은 대충 이렇다. 믿었던 남편과 어머니에 대한 배신감으로 인한 비탄에 위안이 되어주었던 아버지와 이모가 사망하자, 잔은 유일한 혈육인 자신의 아들 폴에게서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폴은 그런 기대를 외면하고 잔의 남은 재산을 조금씩 갉아 먹는 소위 '빈대'로 전락한다. 결국 무리한 욕심에 빚더미에 올라앉는 신세가 되고, 더불어 폴과 여생을 함께 하려는 잔의 소박한 바람마저 무위가 되고 만다. 폴은 어머니에게 양육을 부탁드린다는 편지와 함께 자신의 어린 자식을 잔에게 맡긴다. '인생이란 그렇게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는 여종 로잘리의 말은 손주를 품에 안으며 사랑스럽다는 듯이 키스를 퍼붓는 잔을 향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마지막까지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모파상의 의지를 찾는 것도 가능할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가당찮은 얘기라고 생각한다. 인생에 대한 관점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 아이가 나중에 자라서 기대에 완전히 어긋날 가능성은 항시 존재한다.  물론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어찌 될지는 현시점에 전혀 알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인생이란 그렇게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는 말이 일종의 판단 보류를 선언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왠지 나는 이 대목이 모파상의 어물쩍거림이라는 생각이 든다. 온갖 비참을 겪은 잔느의 삶에 대한 독자의 연민을 보듬기 위한 작가의 '구원의 동아줄'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달까. 작가 자신은 실상 그것이 얼마든지 썩은 동아줄일 가능성이 상존(常存)한다는 걸 인지하고 있음에도.
문학평론가 이춘복 역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주인공 잔느의 불행은, 남편의 배반만으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실은 여행에서 부모 곁으로 돌아왔을 때의 긴장된 잔느의 감정도 작가는 빠뜨리지 않고 있다. 인간 존재의 절대적인 고독, 이것이야말로 모파상이 도저히 숨길 수 없었던 격한 감개였다. 잔은 서로 사랑하며 결합된 남편과 참된 부부애를 체험하기 직전에 '두 사람은 결코 영혼까지, 마음의 밑바닥까지는 서로가 침투할 수 없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더구나 부부간의 도취의 경험이 그녀를 한층 더 고독 속으로 몰아넣기 위한 덫으로서 그려져 있다는 것은 끝없는 빈정거림이랄 수밖에 없다. 이야기의 매듭에 잔과는 대조적으로 씩씩한 생활력을 갖는 하녀 로잘리의 말이 있다. "세상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군요." 이 이상 더 지당한 말은 없다할지라도 이 말 정도로 치료받을 수 있는 그런 고독감은 아니다. 제비가 날고 양귀비꽃이 피어 있는 사월의 들을, 마차에 흔들리면서, 손녀딸의 체온을 느끼고 '두 팔로 안아 올려 미친듯이 키스의 비를 퍼부으면서 미친듯이 꼭 끌어안았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잔의 고독감이 구원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아들 폴의 비행이나 배덕은 사실 어느 정도 잔에게도 책임이 없지 아니하다. 남편을 잃은 잔의 유일한 잘못이라면 상실감을 보상 받기 위해 자식에 대한, 집착이라는 것으로 불리어도 무방할 '무분별하고 맹목적인 애정'을 과도하게 쏟아 폴을 응석받이로 키웠다는 거다. 중학교 교육을 위해 폴을 입학시켜야 한다는 주위의 충고에도 자신의 곁을 떠나게 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격하게 반대한다.

상실감을 보상하기 위한 애정이나 자신의 좌절된 희망이나 이상을 자식에게 투영하는 것에 대해 잔의 아버지는 이렇게 충고한다.

"폴은 곧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된다. 그때엔 너를 원망하게 될 게다. 어머니의 이기주의에 희생이 되어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됐다고 말이다. 어머니의 무분별하고 맹목적인 애정으로 말미암아 이 따위밖에 못 되었다고 따지고 들면 넌 뭐라고 대꾸하겠니?"

이에 대한 잔의 대답.

"여지껏 저는 말할 수 없이 불행했어요. 이 애만이 단 하나의 희망이고 기쁨이었어요. 그런데 이젠 이것마저 빼앗아가려는 것이군요. 전 이 애 없이 혼자서 살아갈 수 없어요."


이 정도만 해도 자식 농사라는 밭의 방충망에 충분한 구멍이 뚫려있는 셈이다. 잔의 증세는 사실 이것보다 더 심각해서 병리적인 집착이라 할 만한 수준의 것이다. 폴의 동거녀에 대한 질투를 보라.

무서운 고통이 잔의 심장을 뒤집어 놓았다. 아직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여자, 바로 그녀의 품에서 자식을 빼앗아간 여자에 대한 미칠듯한 증오가 끓어올랐다.(중략)…잔은 알지 못하는 그 여자에 대한 적개심으로 차라리 자식을 내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 오를 정도였다.


다음은 잔의 치명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구절.

 

그러한 계집과 자식을 공유하느니보다 자식을 영원히 잃어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프롬 식으로 말하자면, '공유'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잔은 폴을 '존재'로서 대한 것이 아니라 '소유'의 대상으로 대한 것처럼 느껴진다. '가질 수 없으면 차라리 그것을 소멸시켜라.' 이것은 욕구 충족이 좌절된 어린이의 심리 아닌가? 다른 아이의 장난감을 뺏으려다가 무위로 그치자 그것을 부숴버리는 어린이의 심리 말이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이런 심리의 소유자는 욕망의 대상을 온전히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파괴한다. 변심한 애인을 살해하는 이가 딱 그 경우다. 욕망의 대상을 파괴할 용기(?)가 없는 자는 파괴의 표적으로 자기 자신을 삼고 자살한다. 그들의 심리는 이럴 것이다. '나를 거부한 죄책감을 평생 안고 살아라.'
(베르테르의 경우는 이 경우와 다르다. 베르테르의 경우는 좌절된 사랑이 그의 심미안을 흐리게 하고 낭만주의적 '비전'의 빛을 바래게 했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옳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잔을 단죄하기 이전에 역시 과오의 인과를 캐지 않을 수 없다. 잔의 남편이 바람둥이가 아닌 착실한 자였다면 벼랑에서 굴러 떨어져 죽을 일도 없었을 것이고 잔의 자식에 대한 과도한 집착도 그만큼 심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 근원을 따지려 한다면, 잔의 남편 줄리앙이 그렇게 된 심층적인 원인도 있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런 것들은 잔이 어찌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남편의 바람기를 알고 결혼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잔의 잘못이라면, 남편의 애정에 대한 상실감의 구멍을 그대로 간직한 채 사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자식이라는 존재로 무리하게 채워 막으려는 데 있을 것이다. 자유의지를 어느 정도 인정한다면, 그녀는 자식에 대한 병적인 집착으로 나아가기 전에 자신을 제어하는 길을 선택했어야 한다고 추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왜 그녀는 제어하지 못했을까? 아니, 그 전에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것은 일종의 환상은 아닐까?

 

사실 말이 쉽지 상실감의 큰 구멍을 인내하며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잔의 무분별함을 책망하기 전에 병적인 집착을 제어할 수 없었던 잔의 심중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원인을 생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여성의 사회 참여나 꿈의 실현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던 시대(귀족 여자의 경우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졸업 후 귀족 남자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양육하는 일 말고는 다른 삶의 길이 차단되었던 시대)에 잔이 심리적 충격을 극복할 다른 수단은 대체 무엇이 있었단 말인가. 실연한 남자가 예술이나 학문, 또는 스포츠 등의 활동으로 인정을 받아 상실감을 보상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결혼하여 아이를 낳아 잘 기르는 것이 여자의 유일한 의무와 미덕으로 강제되었던 시절에 잔이 위로 받을 수단은 그녀의 아들 이외에 또 무엇이 있었을까? 종교마저도  환멸로만 남은 그녀에게. 자, 이렇게 잔의 비극을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볼 수도 있을 거다. 그러면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이 해소된 상태에서는 자식에 대한 병리학적 집착이 어느 정도 완화가 될까? 나는 모르겠다. 그건 사회학자가 밝힐 문제다.

 

                  그러고 보니 이런 제목의 노래도 있다.  '고달픈 인생길~.' 하지만 남자도 마찬가지다….

 

19세기보다는 상황이 나아진 현재일지라도 자식에 대한 이런 집착―모성이라는 미명으로 포장된―은 드문 일이 아닌 것 같다. 가부장적인 사회의 예속이 그만큼 지속적이기 때문일까? 그런 이유도 여전히 있겠지만, 단순히 그것으로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라는 것을 '강한 결정론자'처럼 아예 부정하지만은 않는다면, 모든 예속적인 집착을 의식적으로 끊으려 노력하는 것은 어떨까? 카프카의 <변신>에서처럼 관계의 허상을 통찰하고 자아의 중심을 온전히 타 존재로 채우려 하지않는 것. 비록 지난한 일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우연의 폭탄과 불가항력이라는 운명 앞에서 우리가 애쓸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아닐까?
아니…생각해 보니 이렇게 할 수 있는 것 역시 결정론적인 영향하에서의 가능성일 뿐이지 않은가. 이렇게 말하는 나는 어쩔 수 없는 결정론자인가 보다(하지만 이런 식의 단정은 아직 이르다고 말할 수도 있다. 결정론을 인정하는 순간 반인륜적 범죄자에 대한 단죄는 어떻게 합리화가 되는 것인가?)

종종 TV드라마를 보면서 쓴웃음을 짓곤 하는데 특히 어머니가 아들의 딱히 행실이 바르지 않은 것도 아닌 연인에 대해 못마땅해 하며 결혼을 결사반대하는 장면이 나올 때 그렇다. 현대판 '잔'이요, '모렐 부인'이다. 이런 어머니들은 아마도 행복해질 확률보다는 불행해질 확률이 월등하게 높을 것이다. 타 존재를 마리오네트(꼭두각시 인형)처럼 좌지우지함으로써 만족을 얻는 인간은 타인의 손에 가위가 들려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할 무렵부터 점차 불안함이 가중될 터이니.
요컨대 바라는 게 많으면 많을수록, 잠재적 실망의 대상도 비례하여 증가한다. 그리고 잠재적인 것들의 상당부분은 현실태가 되어 우리의 주름살을 늘린다.

위에서 인용한 이츠키 히로유키의 말은 그래서 교훈을 준다. 중언해 보자.

 

"모든 것에 기대하지 않는다."

 

말은 참 쉽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