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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리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일부분 번역 비교

 

 

 

제목이 주는 강렬한 인상에 압도되어, 또는 이따금씩 찾아드는 과거의 상실감으로 인해 현존의 허무가 뼈속 깊숙히 각인되어 '추억이 저 높은 곳에서부터 구원처럼 다가와 도저히 내가 혼자서는 빠져나갈 수 없는 허무로부터 나를 구해주기를' 일말이나마 희망하여 독서에의 욕망을 자극 받지만, 결국 찾게되는 건 '잃어버린 시간'이 아닌 '잃어버린 수면'이 되어버리는, 또는 혹자의 말마따나 '시간을 잃어버리고 싶으면(허비하고 싶으면) 읽어야 할 책'이라는 오명마저 쓴, 가독성이 떨어지기로 악명 높은 마르셀 푸르스트의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도서출판 <민음사>에서 재작년에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한 것을 읽다보니 문득 의문점이 드는 부분이 있다(뭐, 사실 따지고 보면 의문점이 드는 곳이 어디 한두 군데겠나. 오죽하면 원어민인 프랑스인들도 어려워할까). 이모할머니, 그러니까 외할머니의 두 여동생들인 셀린과 플로라의 대화 장면이다. 발췌한 아래의 문장을 두 여동생들의 이름(셀린과 플로라)에 주목하여 읽어보라. 소설의 화자는 일인칭인 '나'다.

 

할아버지가 스완에게 그 웅변가에 관한 질문을 던지자마자, 할머니의 여동생 중 한 분의 귀에는 그 질문이 심오하지만 시의적절하지 않은 침묵처럼 울려, 그걸 깨트리는 것이 예의 바른 일이라고 생각하셨는지, 다른 또 한 분의 동생에게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셀린, 난 젊은 스웨덴 태생 여교사를 알게 되었는데, 그분은 내게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협동조합에 대해 아주 흥미로운 점들을 상세하게 알려줬어. 한번 우리 집 저녁 식사에 초대해야겠어." "그거 좋겠네요." 하고 동생 플로라가 대답했다. "하지만 저도 쓸데없이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어요. 뱅퇴유 씨 댁에서 모방(Henry Maubant : 코메디 프랑세즈 극장의 연극 배우)을 잘 아는 어떤 노학자를 만났는데, 모방이 그 학자분에게 맡은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 줬다는 거예요. 얼마나 흥미로운 이야기였는지 몰라요. 그분은 뱅퇴유 씨 이웃이라는데 전 그 사실을 전혀 몰랐지 뭐예요. 아주 친절한 분이던데." "이웃에 친절한 사람이 사는 게 뱅퇴유 씨뿐인가 뭐." 하고 셀린 할머니가 말했는데, 수줍음 때문에 목소리는 더 컸고, 심사숙고한 탓에 더 부자연스러웠다.
                                                                   -민음사/김희영 옮김.

 

편의를 위해 위 문장들을 문단도 나누고 내용도 좀 압축하여 다듬어 보자. 생략된 문장은 '(…)'로 표시한다.

(…)할머니의 여동생 중 한 분이(…)다른 또 한 분의 동생에게 말을 걸었다. "셀린, 난 젊은 스웨덴 태생 여고사를 알게 되었는데(…)한번 우리 집 저녁 식사에 초대해야겠어."
"그거 좋겠네요." 하고 동생 플로라가 대답했다. "하지만 저도 쓸데없이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어요. 뱅퇴유 씨 댁에서() 어떤 노학자를 만났는데,(…) 그 분이 뱅퇴유 씨 이웃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지 뭐예요. 아주 친절한 분이던데."
"이웃에 친절한 사람이 사는 게 뱅퇴유 씨 뿐인가 뭐." 하고 셀린 할머니가 말했는데(…).

누구든지 이름에 혼동이 있음을 알아챘을 것이다. 경어를 쓰지 않는 언니 쪽은 대체 셀린인가 플로라인가?
혹시 '동생' 플로라의 이름이 '셀린 플로라'인가? 물론 그럴 리는 없다.  

 

  민음사의 번역판에서 <주요 등장인물>로 소개된 셀린과 플로라 자매.

 

 

 오역일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세상에 누가 사람 이름을 오역하겠는가? 이런 건 오역이라기 보다는 번역가가 잠시 한눈을 판 거라고 보는 게 타당할 거라고 생각을 했다. 확인을 위해 이보다는 오래전에 번역되어 출간된 도서출판<국일미디어>의 것을 비교했다. 그랬더니,


 
"이봐 셀린, 난 말야, 스웨덴 태생의 젊은 여교사와 친지가 되었는데, 그분이 들려준 스칸디나비아 고장의 협동조합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어찌나 재미있었는지 몰라, 한번 저녁 식사에 그분을 초대해야겠어." ─  "그게 좋겠지!" 하고 언니 플로라가 대답했다. "그런데 말야, 나도 멍하니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았어. 난 말야, 뱅퇴유 댁에서 어느 노학자를 만났는데, 그분은 모방(Henry Maubant : 코메디 프랑세스 극장의 연극 배우)과 절친한 사이야. 그래서 모방이 맡은 배역을 어떻게 구상하는지 퍽 세밀하게 설명해 주시지 뭐야. 더할 나위 없이 재미나는 이야기였어. 그분은 뱅퇴유 씨의 이웃이래. 난 통 그 사실을 몰랐지 뭐야. 아주 친절한 분이셔." ─ "친절한 이웃을 가진 이가 뭐 뱅퇴유 씨뿐인가." 하고 셀린 할머니가, 소심 때문에 도리어 크게 나온 목소리, 너무 심사숙고했기 때문에 부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목소리로 외쳤다.

                                                              -국일미디어/김창석 옮김

 

민음사의 번역과 동일한 문제가 있다. 재미있는 건 민음사의 경우 '동생 플로라'라고 번역한데 반해, 국일미디어는 '언니 플로라'라고 번역했다는 점이다. 추측하건대, 저자인 프루스트가 플로라의 이름 앞에 '언니' 혹은 '동생'을 명시했다면 이런 식의 상반된 번역이 나올 리는 없다. 아마도 번역자가 독자의 혼동을 우려하여 첨가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뭐, 아님 말고.
정답부터 말하자면 '동생 플로라'가 맞다. 다음의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다. 국일미디어의 번역판에서 옮긴다.

"암 그렇지, 너는 썩 잘했어. 내가 감탄할 만큼." 하고 셀린이 말했다. ─ "그러는 언니 역시 썩 잘하던 걸."


 
김창석의 번역판도 민음사의 것과 마찬가지로 이 부분을 확인해 보면 셀린이 언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아 이전 부분의 '언니 플로라가 대답했다'라는 문장은 번역자의 사소한 실수라고 생각된다.

 

 

 

            이와이 슈운지의 영화 <러브레터>의 한 장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들고 있는 어린 시절의 후지이 이즈키.



 

마지막으로 아주 오래전에 출판된, 문고판 형식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보자. 도서출판 <학원사>의 것이다.

 

"이봐, 셀린느, 난 스웨덴 태생의 젊은 여선생을 알게 됐는데, 그분은 내게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있는 여러 나라의 협동조합에 관해 상세하게 알려 주었지. 매우 흥미롭더군. 어느 날 저녁 식사에 그분을 초대해야겠어. 그래, 그게 좋겠어. 하지만 나도 멍하니 시간을 보내진 않았어. 난 말이야, 뱅퇴유 씨 댁에서 어느 노학자를 만났는데, 그분은 모방((Henry Maubant : 코메디 프랑세스 극장의 연극 배우)과 절친한 사이였어. 그래서, 모방은 그분에게 자기가 맡은 역을 소화하기 위해 자기가 어떻게 처신하는가에 관해 퍽 세밀하게 설명해 주었었대. 얼마나 재미있는 얘기였는지 몰라. 그분은 뱅퇴유 씨의 이웃이라는데, 난 그 사실을 전혀 몰랐지 뭐야. 아주 친절한 분이시던데." 하고 플로라 할머니가 말했다. ─  "친절한 이웃을 가진 사람이 뱅퇴유 씨뿐인가 뭐." 하고 셀린느 할머니가 말했는데, 그 목소리는 수줍어했기 때문에 도리어 더 컸고 심사숙고한 탓으로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웠다.

                                                               -학원사/김인환 옮김

 

<학원사>의 번역은 확실히 위의 두 출판사의 것과는 달리 셀린과 플로라의 대화가 서로 모순없이 배치되어 있다. 하지만 문제는 대화의 내용이다. 바로 위에서 밑줄로 표시한 접속부사 '하지만'의 전후 문맥이 전혀 이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라니, 대체 무엇에 대한 '하지만'이란 말인가?

추론해보자. 이미 언급했다시피, 민음사와 국일미디어의 번역자들이 여성의 이름인 플로라를 셀린, 혹은 셀린느(Celine)로 잘못 번역할 리는 없다. 잠시 한눈을 판 것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것이, 두 번역자 모두 대화체의 서두("셀린, 난 젊은 스웨덴 태생 여교사를 알게 되었는데…")에 '셀린'이라고 명시하지 않았는가.
이 경우 가능한 추측은 원문 자체가 원래 그랬다는 얘기인데, 그렇다면 두 번역자(김희영, 김창석) 모두 같은 원본, 그러니까 같은 출판사에서 발간한 원서를 번역했기 때문일까? 민음사 번역판의 번역자인 김희영은 역자 후기에서 이렇게 밝힌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전 권을 우리말로 처음 옮긴 김창석 씨의 번역은(1985년) 원문에 충실하긴 하지만 조금은 오래된 우리말 표현과 한자어, 드문 주석 탓에 프루스트 읽기가 어렵다는 인상을 준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게다가 1987년 새로운 '플레이아드 전집' 출간은 1954년 텍스트(김창석 씨가 번역한)와는 다른 판본을 제시하며, 또 프루스트 연구자들이 주석 작업을 계속 진행하고 있어 세계 각국에서 새로운 프루스트 번역이 이루어지는 중이다.

아닌게 아니라, 김창석은 자신의 번역판 후기에 이렇게 밝힌다.

끝으로 이 역서의 저본은 1954년 N.R.F.사에서 발간한 플레이아드(Pléiad) 문고판A la recherche du temps perdu(전 7권)임을 밝혀 둔다.

세월의 차이――구판이냐 개정판이냐 하는 차이는 있지만 동일한 텍스트로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면…플레이아드 문고판의 실수라는 얘기일까? 그게 아니라면, 원작자인 프루스트의 필사본에 이런 사소한 실수가 있었다는 얘기일까? 어쩌면 <학원사>의 김인환 역자 역시 같은 원서로 번역을 했고, 그러다보니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을 의식하여 셀린과 플로라 각자의 대사를 플로라에 의한 하나의 대사로 자의적으로 뒤섞어버린 것은 아닐까?

원서를 구할 수 없는 입장인 나로서는 불문학에 입신하신 학자분들이 언젠가 이 사소한 사실─이런 걸 구구절절 따지는 일이 쪼잔해 보일만큼 사소한─을 밝혀주길 기대한다.


 

 

영화 <러브레터>의 한 장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뒷표지에 부착된 도서대출카드 뒷면에 그려진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후지이 이즈키.

 

 

 

 

이제 다른 문제로 넘어가 보자. 이 문제를 언급하기 위해서는 화자(나) 집안의 가계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할아버지(아메데) : 화자의 외할아버지로 아돌프 작은 할아버지의 형님.
할머니(바틸드) : 화자의 외할머니.

이제 다음의 문장을 보자. 주인공인 화자가 아돌프 작은 할아버지와 그의 지인인 '분홍빛 드레스의 여인'을 만나는
면이다.

 그녀가 나를 보며 미소를 짓자 (아돌프)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내 종손자요." 그러나 내 이름도 말하지 않고 내게 그녀의 이름도 말해 주지 않았다.(중략)
 "어머니와 많이 닮았네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내 조카딸을 사진에서만 봤잖소." 하고 할아버지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격하게 말씀하셨다.
(중략)

 "아, 그래." 하고 갑자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당신 집에서 이 젊은이의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당신 조카분 아니었던가요? 어떻게 잊을 수가 있었지? 아주 좋은 분으로 저에게도 아주 잘해 주셨는데."(중략)

 그러나 아버지의 신중함과 냉정함을 잘 아는 나는 그녀가 잘해 주었다고 말하는 아버지의 응대가 얼마나 거칠었을까 생각하니 마치 아버지가 실례라도 저지른 것처럼, 아버지에 대한 그녀의 감사 표시와 아버지의 불충분한 친절 사이에 어떤 불균형이 느껴져 거북했다.

                                                         -민음사/김희영 옮김

 

여기서도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아돌프 (작은)할아버지의 입장에서 화자의 어머니가 '조카딸', 그러니까 '형제의 딸'이라면, 아돌프 할아버지와 그의 형인 아메데 할아버지는 화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모계 쪽 사람들이 된다. 그런데 위 문장에서는 화자의 아버지를 일러 '조카분'이라고 하는데, 화자의 아버지는 아돌프 (작은)할아버지 입장에서는 조카사위이지 조카뻘은 아니다. 민음사 번역본의 <등장인물>란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부가되어 있다.

누구나 한번은 이상한 가계도에 놀란다. 삼대가 한 집에 살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의 사촌과 할머니의 자매가 함께 사는 가족 형태, 게다가 작품에서 한번도 외가인지 친가인지 명시하지않아 할아버지 쪽은 친가, 할머니 쪽은 외가라는 느낌을 주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명시하지 않았다기보다는(화자의 어머니를 일러 '조카딸', 그러니까 형님의 딸이라고 분명히 명시는 했다) 사실 명시의 혼동이라고 봐야 한다. 이 할아버지 형제는 대체 모계 쪽 분들인가 아니면 부계 쪽 분들인가?

만약 위 문장에 오역이 아니라면, 원서나 저자인 프루스트의 착오가 아닐까?
(그러나 불어에 일천한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누군가 전문적 지식을 가진 분이 사실을 알려주기를 바란다.)

(위 문장에서)'조카딸'과 '조카분'의 모순을 다른 번역서에서는 어떻게 다루었는지 살펴보자.

 "어머나! 어머니하고 꼭 닮았네"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렇지만 나의 조카딸을 본 것은 사진에서뿐 아니오" 하고 종조부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퉁명스레 말했다.

 (중략)
 "그렇지" 하고 그녀는 갑자기 말을 이었다. "저는 이 도련님의 엄친(親)을 만나 뵌 적이 있을 거예요. 당신의 조카뻘 되는 분 아니에요? 어떻게 잊을 수 있었을까? 그분 참 저에게 친절하셨고, 아주 멋있는 분이었는데" 라고 얌전하게, 동시에 다정다감하게 말했다. 멋있었다고 그녀는 말하지만, 아버지이고 보니 매우 무뚝뚝하게 응대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버지의 조심성과 냉담성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아버지에게 주어진 지나친 감사의 정과 아버지의 불충분한 친절 사이이 불균등이, 마치 아버지가 범한 무례한 언동처럼 거북스러웠다.
                                                         -국일미디어/김창석 옮김

 

같은 원서를 번역한 국일미디어의 것도 마찬가지의 모순이 드러난다. '조카'와 '조카뻘'은 다른 의미가 아니냐고 생각하시는 분은 아래의 사전적 정의를 보라.

 


 

 

 

 


마지막으로 학원사의 것을 확인해 보자.

 "어머니하고 꼭 닮았네."

 "그렇지만 내 조카며느리를 사진으로밖엔 보지 못했잖소." 하고 작은 할아버지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중략)
 "그래요." 하고 그녀는 갑자기 말을 이었다. "저는 당신 집에서 이 도련님의 부친을 뵌 적이 틀림없이 있었어요. 당신의 조카뻘 되는 분이잖아요? 제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그분은 저에게 정말 친절하셨고, 아주 좋은 분이었어요."
                                                                  -학원사/김인환 옮김

 

학원사의 번역은 모순이 없다는 점에서 위의 두 번역판과는 확실히 다르다. 이 번역판에서 화자의 어머니는 아돌프 작은(외)할아버지의 조카며느리가 되고, 화자의 아버지는 조카가 된다. 즉, 화자의 기준에서 모계가 아닌 부계로 설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학원사의 번역이 맞는 걸까? 논리적으로는 그렇지만, 나는 민음사의 김희영 번역가의 말("할아버지 쪽은 친가, 할머니 쪽은 외가라는 느낌을 주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처럼 원작자의 혼동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이 든다. 왜냐하면 소설을 읽다보면 모계라는 것이 종종 느껴질뿐더러, 김희영 번역가가 본문에서 몇 차례 지적했듯이, 프루스트는 이 이외에 다른 종류의 착오(연대기적 착오)를 드러내는 부분마저 있기 때문이다.

병약한 탓에 방의 문 틈을 코르크로 막아 외부의 공기와 소음을차단한 채 다량의 커피에 의존해서 이 방대한 소설을 쓴 프루스트. 어쩌면 이러한 선천적 병약함과, 꿈과 같은 혼미한 이미지의 방대한 과거를 재현함에 기인하는 정신적 피로감이 이 모든 사소한 오류들의 원인이었을까?


 



 사족 : 또 다른 출판사인 <동서문화사>의 번역본은 가지고 있지 않아서 아직 확인을 해 보지 못했다.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소개하도록 하겠다.

 

<학원사>의 것은 현재 절판된 상태다. 김인환의 번역은 현재 <문예출판사>의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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