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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리뷰

설국(雪國)

 

 

 

 

"지방의 경계에 있는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雪國)이었다." (※雪國 : '눈의 고장'이라는 뜻)


 

1968년, 일본에 최초의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소설 <설국>은 위와 같이 주어가 없는 아주 인상적인 문장으로 시작한다. 문득 궁금증이 든다. 라틴어 문화권의 서양에서는 주어 없는 이 문장을 어떻게 번역할까? 명령문과 구어체 문장(Spoken English)이 아닌 위와 같은 문장의 경우 주어가 누락된 번역이 가능할까?

(BBK 주가조작 사건의 결정적 증거물이었던 MB의 광운대 강연 동영상 CD를 본 나경원은 "CD에는 ‘BBK를 설립했다’고만 언급돼 있지 ‘내가’ 설립하였다고 돼 있지 않다"는ㅡ한마디로 '주어 없다'는 식의 대단히 창조적인 '쉴드를 쳤던' 바 있다. 서구 언론에서는 이 사건의 내용을 어떻게 번역하여 기사화했던 걸까? 외국어 40점이었던 나로서는 도통 상상이 안된다.)

 

어쨌거나 작가 김연수가 지금까지(46세가 되기까지) 무려 다섯 번 이상 읽었다는 <설국>은 '일본 서정 소설의 고전'으로 널리 회자되는 작품이란다. 심미적 감각의 소유자인 주인공 시마무라는 기차의 차창에 비친 젊은 여자의 얼굴 위로 창 바깥의 불빛이 겹쳐지는 순간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묘사한다.


무심히 손가락으로 유리창에 선을 긋자, 거기에 웬 여자의 한쪽 눈이 뚜렷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아무 것도 아닌, 건너편 좌석의 여자가 비친 것이었다. 바깥엔 어둠이 내려져 있고, 기차 안은 불이 켜져 있다. 그래서 창 유리가 일종의 거울이 된다. 그렇지만 스팀의 온기 때문에 차창이 온통 수증기에 젖어 있어서 손가락으로 닦을 때까지 그 거울은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처녀의 한쪽 눈은 이상하리만큼 아름다웠지만, 시마무라는 얼굴을 창에 대고, 별안간 저녁 경치가 보고 싶은 듯한 그런 여수(旅愁)에 젖은 표정을 지으며 손바닥으로 유리창을 문질렀다.
()
거울 밑바닥에는 저녁 풍경이 흐르고 있어서, 말하자면 비치는 것과 비춰주는 거울이 영화의 이중 영상처럼 움직였다. 등장 인물과 배경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었다. 더구나 인물은 투명한 덧없음으로, 풍경은 저녁 어둠의 몽롱한 흐름으로, 그 두 가지가 묘하게 융합되어 이 세상이 아닌 상징의 세계를 그리고 있었다. 특히 처녀의 얼굴 한가운데에 들이나 산에 켜진 등불이 비췄을 때에는, 시마무라는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가슴이 떨렸을 정도였다.

 

 

 

미감(美感)이 차창 밖의 불빛처럼 번뜩이는 명문이다. 하지만 성애적(?) 미감의 소유자에게 더욱 인상 깊을 문장은 아마도 위 문장의 바로 앞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대목일 거다.

 

시마무라는 너무 심심하고 지겨워서 왼손 엄지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가만히 바라보며, 결국 이 손가락만이 지금부터 만나러 가는 여자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똑똑히 떠올리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오히려 흐려지는듯 기억은 덧없는데도, 이 손가락만은 여자의 촉감에 지금도 젖어 있어서 자기를 먼 곳의 그 여자에게로 이끌어가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코로 가져 가서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다가(후략)


묘하게 에로틱하다…

이보다 한층 더 인상 깊게 다가온 문장은 다음과 같다.

 

고마코의 입술은 아름다운 거머리처럼 매끄러웠다.

 

'거머리처럼 매끄러웠다'니, 정말이지 탁월한 직유(直喩)라고 칭찬해 마지 않을 수 없다. 그 생생한 질감이 날것 그대로 전해져오는 것만 같다.
하지만 <설국>에서 심금(心琴)의 G현을 울린, 진정으로 인상 깊은 문장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 솔직하고 실감이 담긴 말투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 일 없이 살아가고 있는 시마무라에게는 매우 의외였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 일 없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 이 문장을 대충 한 단어로 줄이면 '한량(閑良)'이 된다. 지금은 의미가 '도적놈 일당'이 되어버린 '불한당(不汗黨)'이라는 낱말도 한자를 풀어 보면 '땀(汗)을 흘리지 않는 무리', 즉 일 없이 놀고 먹는 놈팽이들을 일컫는 말이(라고 영화 <넘버3>에서 마동팔 검사가 가르쳐주었)다.

 

 


 

땀을 흘리지 않고 먹고 노는, 참으로 부러워해 마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이라…글타. 이들을 한때는 '셔터맨'이라고 지칭한 적이 있었다(주어 없다). 문득 떠오르는 90년대 중후반의 기억.

 

90년대 중후반의 어느 날, 후배 S군이 찾아왔다. "혼자 왔냐?" 내가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는 농담 삼아 "다음에는 혼자 오지 말고 여자 한 명 데리고 와라"라고 말했다. S군은 씨익~웃음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한 달 후, S군이 또 방문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진짜로 여자를 데리고 온 것이었다! 기특한 놈.
S군이 그녀를 소개했다. 초등학교 동창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 모 여대의 약학과에 재학중이라고 했다. 나중에 S군과 단 둘이 있게 될 때 내가 슬쩍 물었다. "걔랑 사귀고 있냐?" 전혀 아니란다. 그저 동창 친구 사이라는 거다. 여자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실례를 그때 처음 보았다.
S군이 우리집에서 나가기 직전에 의미심장한 썩소를 보내며 내게 은밀하게 말을 건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형…쟤랑 잘 해보세요…잘 하면 '셔터맨'으로 평생 사실 수 있어요."
가끔 영화<타짜>를 보면 그때의 그 일이 떠오른다. 바로 김혜수의 다음과 같은 대사 때문에.

 

 

 

 

문학평론가 정여울은 이렇게 말했다.


사랑의 대상이 영원히 멀리 있음으로써 온전한 환상으로 남아주기를 바라는 마음. 사랑의 환상을 생활의 현실 속으로 끌어들여 사랑을 망치고 싶지 않은 마음을 슬프도록 아름답게 그려낸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설국>이다.

(중략)
'무위도식하는 남자의 전형인 시마무라. 그는 '그녀(고마코)는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다'는 차원을 넘어서, 자신의 불가능한 사랑을 보존시키기 위해 능동적으로 '그녀와의 거리'를 유지하기까지 한다.
(중략)
고마코를 향한 거리는 한 여자를 '내 것'으로도, '내 것이 아닌 것'으로도 고정하지 않으려는 모호한 태도다. 이 거리는 '너는 나의 비공식 연인이 될 수는 있지만 공식적 연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무언으로 암시하는 냉혹함이기도 하다. 요코를 향한 거리는 말 그대로 미학적 거리다."

 

자기 손가락에서 여자의 자취를 찾는 심미적 감각의 소유자인(내 소감대로 말하자면 변태적 감각의 소유자인) 시마무라의 태도를 결정하는 요인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현실을 압도하는 환상의 힘' 정도가 될까. 반면에 여자의 자취에서 자신의 손가락을 찾는, 지극히 현실적인 감각을 지닌 탓에 '미학적 거리' 대신에 '촉각적 밀착'을 추구하는 인간도 간혹 이런 환상을 추구할 때가 아예 없지는 아니 하다. 정여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썼다.

 

"욕망을 '계속 생생하게 살아 있게' 하려면 욕망의 최종적인 실현을 방해해야만 하는 것일까."

 

욕망의 뜨거운 불길이 충족이라는 물벼락으로 진화된 자리에는 권태라는 잿더미가 남는다는 얘기다. 욕망의 충족은 권태에의 Prelude(전주곡). 충족된 욕망의 갱신 불가능성. 앙드레 지드는 <지상의 양식>에서 이렇게 썼다. "진실로 그대에게 말하거니와, 나타나엘이여, 욕망의 대상을 갖는다는 그 언제나 허망한 소유보다도, 어떤 욕망이든지 욕망 그 자체가 나를 더욱 풍부하게 하여 주었느니라."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말도 남겼단다. “성적인 욕망은 육체적 근접성에 따라 증가하고 사랑은 사랑 받는 대상이 부재 중일 때 가장 강하며 사랑은 유지되기 위해 (...) 일정한 거리를 필요로 한다.”
야동계에 불황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글타. 시마무라와도 같은 어정쩡한, 당시의 나의 태도는 어쩌면 무위도식 셔터맨에의 욕망을 지연시킴으로써 일종의 환상으로 '계속 생생하게 살아있게' 하려는 의지의 발로였을지도 모른다. 한량에의 꿈은 환상으로 지속될 때, "그런 데서 애처로운 몽환의 세계가 생겨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농담이다.)

 

 

 

 

사족1) 내 얘기는 너무 진지하게 들으면 아니된다…

 

사족2) 어제 치악산 인근 휴양림의 펜션에서 K 모 씨와 단 둘이 오붓하게 하룻밤을 보냈다. 학문은 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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