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학이나 과학 분야 관련 도서는 거의 읽지 않는다. 내 뇌용량과 두뇌 회전의 수준을 잘 알기 때문이다(그래도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언젠가 읽어야겠다고 다짐은 하고 있다). 비슷한 이유로 철학책을 잘 읽지 않는다. 그나마 2차 문헌이라면 모를까(아니, 사실 2차문헌도 버겁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철학자의 저서는 절대 읽지 않는다.
젊었을 때 폼 잡는다고 <죽음에 이르는 병>을 사서 읽다가 '졸음에 이르는 병'을 얻은 이후로 그렇게 되었다. 오징어인 주제에 자기가 마치 주윤발인양 육체적 후까시는 담배나 이쑤시개로, 정신적 후까시는 교양서로 치장하고픈 허영이 몸에 조금은 배어있던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미팅 나가서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읽어 보셨습니까? 실존주의의 선구라 할 작품…"하며 거드름을 피운 건 아니다만.
(대신 선배들에게 한 수 배운대로 다음과 같은 뻥은 치고 다녔을지도 모른다. "국내 클래식 연주가에도 태권도와 같은 등급이 매겨진다, 세고비아는 9단이고 국내의 모 연주자는 3단이다, 내 옆에 있는 영철이가 1단이고 나는 아직 '빨간 띠'다." 한 친구는 이런 구라도 쳤다는데, 사실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리스트의 제자인 펄 벅이 <대지>라는 교향시를 썼는데 베이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세계적 수석 지휘자인 왕룽에 의해 초연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오글거리는 오징어들의 발정…아니, 발악이었다).
내게 이상한 쪽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친 <죽음에 이르는 병>의 첫 페이지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있다. 예전에 다른 후기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재탕한다.
"인간은 정신이다.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신이란 자기(Self)다. 자기란 무엇인가? 자기란 자기 자신에 대한 하나의 관계다. 바꿔 말하면 관계가 자기 자신에게 관계한다고 하는 관계의 내부에 있는 자기를 뜻한다. 따라서 자기란, 관계를 의미하지 않고 관계가 그 자신에게 관계되는 것을 뜻한다."
이 문장을 접했을 때, 순간적으로 나는 아비코 다케마루의 엽기 소설 제목처럼 '살육에 이르는 병'에 걸린듯 싶었다. 다만 그 대상이 번역자인지, 저자인지, 아니면 뇌용량이 모자란 나 자신인지 모호했더랬다. 이도 저도 아니고 단지 저자가 진짜 저렇게 쓴 것이라면 무덤을 파헤쳐 육시(戮屍)라도 할 것 같은…이런 육시랄.
인문학자 남경태의 말대로 철학자란 쉬운 말도 어렵게 만드는 남다른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 나도 이런 재주가 있었으면 조금은 권위가 섰으려나? " 오지(五指)가 왕복하여 가상의 에로스 대상과의 합일에 이르노니, 그 지향성으로 인한 아타락시아가 피투성 실존의 부조리를…" 뭔 개소리냐고? 막히면 스스로 뚫는 게 정신 건강에도 좋다는 얘기다. 아니, 사실은 나도 잘 모른다.
그래서 쉬운 책이 좋다. 어려운 내용을 쉽게 설명해주는 책이 좋다. 거기에 유머까지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마크 롤랜즈의 <우주의 끝에서 철학하기>가 그렇다. SF영화를 소재로 하여 이런 저런 철학적 주제들에 대해 썰하는 식인데, 군데군데 썰렁 개그가 있다. 일례를 들면 이렇다. 터미네이터를 다룬 본문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이에 관련해서는 사이보그 아널드 (슈워제네거)이건 보통의 생물학적인 아널드이건 간에 사실상 큰 차이는 없다. 후자의 경우에 (물리적인) 빛은 슈워제네거의 눈에 부딪힌다. 그러면 시신경을 통해 아널드 뇌의 시각피질로 메시지가 전송된다. 아널드의 대뇌피질, 특히 하측두 피질에서 많은 일이 진행된다."※
이 문장 말미에 주석 표시(※)가 되어 있다. '대체 어떤 세부적인 신경학적 설명이 부가적으로 쓰여있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어 책의 하단에 조그만 글씨로 적혀있는 주석을 봤다. 이렇게 쓰여 있었다.
"미안하다, 아는 척 한번 했다."
아, 이런 썰렁한 개그 감각, 너무 좋다...
본문의 내용들 중에 일부만 언급해 보자. 노바 교수의 구체적인 질문이 뭔지 잘 모르겠지만, 왠지 "아니면…"이라는 말 뒤에는 '기억이나 성격'이 숨겨져 있을 것 같다. 추측컨대 이런 얘기가 아닐지 싶다.
1. A라는 인간이 있다.
2. 그의 팔을 잘라 기계로 대체하면 그는 인간인가?
3. 팔에 이어 그의 다리를 기계로 대체하면 그는 인간인가?
4. 팔다리에 이어 그의 하반신을 기계로 대체하면 그는 인간인가?
5. 위의 것들에 이어 상반신마저 기계로 대체하면 그는 인간인가?
6. 남은 머리에서 감각기관(입,코,귀,피부)을 기계로 대체하면 그는 인간인가? 헥헥헥…
7. 뇌를 제외한 모든 것을 기계로 대체하면 그는 인간인가?
8. 뇌세포-뉴런 따위를 남겨두고 뇌의 재질(?)을 기계로 대체하면 그는 인간인가?
9. 뉴런 따위들을 화학적 인공물로 대체하면 그는 인간인가?
10.………
저자 마크 롤랜즈는 '무엇이 인간인가?' 혹은 '인간을 결정하는 본질적인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대신, "'나'의 자아동일성을 결정하는 본질적인 것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실상 비슷한 질문인 것 같다.
위에서 A가 '나'라고 가정했을 때, 그리고 예컨대 5와 6사이에 있는 5.1, 5.2, 5.3,.5.4……까지 고려한다면 '나인 상태'와 '내가 아닌 상태'의 경계를 딱 꼬집어서 "여기까지!"라고 말하기에는 참 어렵다. 이런 논리로<토탈리콜>의 감독 폴 버호벤은 '자기동일성이란 육체가 아닌 기억이다'고 주장한다고 저자는 말한다(<블레이드 러너>의 리들리 스콧 감독도 유사한 주장을 하는 것 같다).
예전에 환생에 관해 말씀하시는 쌤게 이런 질문을 드린 적이 있다. "쌤, 내가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고 가정했을 때, 다시 말해 환생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면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일단 얼굴은 물론 모든 외관, 심지어 세포마저 모조리 다 바뀐 채 환생한다면, 그 환생한 '나'를 어떻게 '나'라고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나의 기억 역시 깡그리 말소된 상태인데 어떻게 '나'라는 걸 증명하나요? 다시 말해 환생한 '나'와 전생의 '나'가 동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이런 문제가 좀 비현실적이라면 이렇게 막장 드라마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대기업 총수의 차남이다. 어느날 교통사고로 기억을 상실한다. 그리고 30년의 세월이 지난다. 가족과 떨어져서 어딘지도 알 수 없는 곳에서 살고 있는데 우연히 '나'를 발견한 어떤 사람이 나의 정체에 대해 알려준다(어떻게 발견했냐면, '나'의 오른뺨에 있는 일곱개의 점을 보고(헐…) 알아차렸다고 치자. 어차피 막장 드라마이니까).
그리고 아버지가 사망하여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다고 귀띔해준다. 내막을 듣게 된 '나'는 그의 도움을 받아 회사로 찾아가고 자기 몫의 유산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자 형이라는 인간이 나타나서 "너는 내 동생이 아니다."고 우긴다. 재판장에서 유전자 검사를 통한 친자 확인을 증거로 내미는 '나'에게 형 측의 변호사가 말한다. "동생분이라고 하는 분의 체세포는 모두가 교체되어 30년 전의 그것이 아니므로 현재의 그는 과거의 그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뇌조직을 검사한 결과, 예전의 기억이 하나도 없음이 판명되었습니다. 육체와 기억, 그리고 성격마저 예전과 다르다면 이분을 '동생'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1
마크 롤랜즈는 도플갱어를 다룬 <여섯번째 날>을 예로 들면서 이렇게 반박한다. 너의 기억까지 그대로 이식한 복제인간은 '너'인가, 아니면 다른 존재인가?' 골치가 아파지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나름의 결론을 낸다. "만약 우리가 자신이 어던 존재인지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동일성 개념을 더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지면(?) 문제로 여기서 자세히 다룰 수는 없지만, 간단히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예컨대 노랑과 빨강의 그러데이션이 있다, 그것의 중간 부분을 손으로 짚으며 "이것은 빨강인가? 노랑인가? 노랑이라고 당신이 대답한다면, 그 노랑에서 0.01mm 옆에 있는 건 무슨 색인가? 여전히 노랑인가?" ※2
육체(세포), 그리고 인격과 기억에 대해서도 같은 대답을 할 수 있으리라.
※1) 위의 예에서, 만일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다면 '나'의 본질은 유전자라는 얘긴데…솔직히 '유전자'에 대한 지식이라고는 DNA는 이중나선구조라는 것(예전에 생화학 시간에 배웠다)밖에는 아는 바가 없으므로 내가 답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이 문제 역시 위의 1~10...과 같은 비슷한 과정을 거치면 아마도…)
※2) 이런 식으로 물을 수도 있다. "밤과 낮의 사이는 무엇인가? 새벽인가? 그러면 새벽과 밤 사이의 시간은 무엇인가? '새벽밤'이라고? 그러면 그것의 5분 전인'새벽밤'과 '밤' 사이의 시간은 무엇인가? 새벽인가 밤인가?
미안하다, 아는 척 한번 했다….
위의 문제는 이른바 '안과 밖'의 관점에 관한 얘기다. '안에서의 관점'으로 보면 '나'의 인격동일성(자아동일성)은 확고하게 고정된 그 무엇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밖'에서의 관점(혹은 철학자들이 잘 쓰는 말로 '영원의 상' 아래에서 보면), 인격동일성은 한갓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 마크 롤랜즈는 '안과 밖'의 관점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부조리의 문제를 여러 철학적 문제에 접목시켜 설명한다. 그것도 아주 재미있게.
영국의 가디언誌는 이런 평을 했다. "롤랜즈는 철학에 가벼움과 깊이를 더했다." 타임즈는 이렇게 평했다. "이 책 덕분에 어려운 철학이 친절해졌고 가벼운 영화가 깊이를 얻었다. 게다가 유머까지! 한마디로 훌륭하다."
역대 최고의 대중 철학서라 할 만하다. 쵝오.강추.
본문 중 가장 인상 깊은 내용 :
철학에는 사람들의 행위뿐 아니라 믿음에 대해서도 책임을 묻는 오랜 전통이 있다. 혹자는 이를 인식론의 의무론적 전통이라 부른다. 그 기본적인 생각은, 당신은 당신이 행하는 일뿐 아니라 믿는 것에 대해서도 책임, 즉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단지 당신의 믿음이 보통 당신의 행위에 밀접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그렇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좀 더 중요한 이유는, 믿음과 행위가 뚜렷하게 구분된다는 생각 자체가 의심스럽다는 데에 있다.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무언가를 행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은 세계가 제공하는 경험적 증거와 우리가 하는 추론의 과정에 기초해서 우리가 행하는 어떤 일이다.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하는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믿는 일도 우리가 행하는 그 무엇으로서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하는 어떤 것이다. 당신은 경험적 증거들을 꼼꼼히, 또는 건성으로 살펴보며 고려할 수 있다. 당신은 추론 과정을 철저하게, 또는 대충 검토할 수 있다. 증거를 저울질 하는 것은 당신이 하는 어떤 일이다. 당신은 그 일을 잘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 추론은 당신이 하는 어떤 일이다. 당신은 그 일을 잘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 증거를 신중하게 저울질하고 추론 과정을 엄격히 따지는 것은 오직 당신 혼자서 책임을 져야 할 일들이다.
따라서 조심스럽긴 하지만, 우리는 사람들의 행위뿐 아니라 그들의 믿음에 대해서도 비난하는 습관을 들일 필요가 있다. 몰랐다는 건 더 이상 핑계가 되지 않는다. 어리석음도 핑계가 되지 않는다. 전통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해왔어! 그것은 우리 전통의 일부, 우리 문화의 일부, 우리 믿음의 일부야! 애석한 일이지만, 만약 어떤 믿음이 멍청한 것일 경우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믿고 있다거나, 얼마나 오랫동안 그것을 믿어왔다거나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도덕적 문제가 널려있는 이유는 사람들이 멍청한 믿음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어리석음 믿음을 고수하고 있다면, 이는 그가 자신의 믿음 형성에 책임을 충분히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관련된 증거들을 불충분하게 다루었거나, 잘못된 추론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이떤 방식이건 간에, 그 결함은 그들의 책임이다.
우리는 개인적인 책임, 성적인 책임, 부모의 책임에 관해 거리낌 없이 말한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한 책임인 인식적 책임(epistemic responsibility)에 관해서도 말을 꺼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에 대해서 만큼이나 우리가 믿는 바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만약 우리의 가치가 멍청한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는 그렇게 믿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
당신은 파시스트 인가? 식민주의자인가? 엘리트주의자? 거만한 놈? 단지 재수없는 놈인가? 물론 내 변명을 좀 하자면, 내가 이런 비난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젊었을 때 멍청한 믿음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금도 확실하게 그렇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완벽한 인식 기계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 중 일부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상태가 안 좋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최선을 다할 수는 있다. 인식적으로 최선을 다하려는 이런 시도가 지금 이 시대에는 세상 어디를 둘러보아도 눈에 띄게 결여되어 있다.
대체 어떤 믿음이 멍청한 믿음인지를 내가 아직 말하지 않았음에 주목하자. 그러고 싶지는 않다. 그건 꽤나 오만한 일일 것이고, 어떻든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만약 이 책이 어떤 메시지를 갖고 있다면, 당신이 스스로 이런 일들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멍청하지 않으려고 노력해라. 그러면 좀 더 나은 세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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