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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이야기

이끔음

 

7음계에서 일곱 번째 음을 소위 '이끔음'이라 한다. 예컨대 장음계인 '도레미파솔라시도'에서의 '시(영미권에서는 Ti로 표기한다)'음, 그리고 화성/가락 단음계의 '솔#'음 이끔음이라 한다.

무엇을 이끈다는 뜻일까? 바로 안정적인 토닉음(장음계의 '도'음, 단음계의 '라'음)으로 이끌어 준다는 말이다.

 

이끔음을 이해시키기 위해 학생들에게 자주 음계를 연주해 주곤 하는데, 마지막 '도'음을 생략하는 식이다. 그러니까 '도레미파솔라시'까지만 들려주는 거다.
그러고 나서는 느낌을 묻는다.
"어떠세요?"
"글쎄요...뭔가 답답한 느낌이랄까요."

나는 이 '답답한 느낌'을, 품위는 없으나 아주 납득하기 쉬운 말로 이해시킨다.
"그러니까 '똥 싸다 만' 느낌이라는 거죠?"
아니면 피니쉬 라인 바로 직전에 고꾸라진 육상 선수의 기분이랄까.

 

그러니까 이끔음은 안정된 음인 토닉음으로 강력하게 이끄는 음인 셈이다. 예컨대 장음계에서 '시'음은 얼른 안정적인 '도'음으로 전환되어야 마음이 편해진다.

싸다 만 똥, 떨어질랑 말랑 하는 상처 딱지, 단 한 개만 틀린 답안지, 결혼식 전날의 파혼, 골대에서 30센티 벗어난 축구공, 파울라인에서 1미터 벗어난 파울홈런, 손끝에 걸릴랑 말랑 하는 코딱지, 피니쉬 라인 목전에서 자빠진 육상선수, 판돈을 모두 잃은 구땡.....이룰 것 같았지만 성취 직전에 파토난 모든 일들.

 

삶에 존재하는 무수한 '시'음이 지각이나 마음에서 얼른 치워지지 않고 그대로 잔존할 경우 나는 이것을 '삶의 구멍'으로 표현한다. 안정적인 '도'음으로 이끌어지지 못하고 계속해서 떨어지게 만드는 구멍. 혹은 전락.

작가 정여울은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에서 이렇게 썼다. "'도레미파솔라시도'로 불안하게 마음이 요동칠 때마다, 나는 다시 '도=걱정마세요'라는 기준점을 찾는 느낌이었다."
고정된, 혹은 박제된 '시'음이란, 기준점인 '도'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는 구멍이다.

 

'쥐어짜는 듯한' 슬픔의 정서를 지닌 곡들은 대개 '솔#'음을 이끔음으로 사용하는 하모닉마이너 계열의 곡이 많다(스틸하트의 She's gone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끔음을 포함한 V7코드는 뭐랄까, 슬픔의 정서를 분화구처럼 배출하기 일보직전의 느낌이다(그 직전의 llm7b5코드는 슬픔으로 인해 정신 못차리는 느낌이다).
품위 없는 예를 들자면 누군가 일을 보고 있는 공중 화장실 문 앞에서 괄약근에 힘을 '빡' 주고 있는 설사의 상태랄까.

약관의 시기가 까마득한 얘기가 되어버린 요즘에는 하모닉마이너 계열의 음악보다 이끔음이 없는 내추럴마이너 계열의 음악에 더 이끌리는 듯하다.
구멍을 향한 반복되는 자유낙하가 지겨워서 그런 건지 아니면 삶의 괄약근에 힘을 주는 것에 지쳐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레인보우의 <Rainbow eyes>를 듣는다. 이끔음이 없는 내추럴마이너 풍의 곡이다. 그래서인지 가슴을 찢는듯한 슬픔의 정서는 없다. 대신 아련하고도 아릿한 정서는 있는지라, 슬픔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이런 정서가 차라리 좋다. 물감 톤 보다는 파스텔 톤이.

 

https://youtu.be/VaRTocPWbh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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