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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이야기

니르시시스트

 

 

https://www.youtube.com/watch?v=tz1pv3g4YFQ&fbclid=IwAR3buuM5Y0Fw3DVosaAijs7dN_r75wpBX1-Da5gEJtQPUXAcbldeZYkdokw

 

 

소위 '연예인 병'을 근사한(?) 전문 용어로 말하자면 아마도 '나르시시즘'일 것이고 '연예인 병'을 가진 연예인을 일러 '나르시시스트'라고 할 것이다.
<타임>지의 수석 편집자인 제프리 클루거는 자신의 저서 <옆집의 나르시시스트>에서 이러한 연예인 병을 앓지 않은 두 명의 유명 배우를 소개한다. 탐 행크스와 메릴 스트립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메릴 스트립은 악명 높은 나르시시스트의 모습을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너무나 훌륭하게 보여주었다.

 

20살 무렵에 대학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수백 명을 목전에 두고 감히 <마적>을 연주한 적이 있다. 긴장했냐고? 절대로 그렇지 않다. 애당초 긴장을 예상했다면 <마적>을 선곡할 리가 없다. <마적>은 순발력을 요구하는 기교를 필요로 하는 곡이기 때문에 긴장한 채로, 다시 말해 떨리는 오른손으로는 절대로 제대로 연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연주는 '나름' 성공적이었다. 신입생들 중에는 내 연주를 듣고 클래식기타 동아리에 가입한 이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면 결코 좋은 연주는 아니었다. 음들 중 몇 개는 누락되고, 스케일은 버벅거리는, 한마디로 해서는 안 되는 수준 이하의 연주였다.
그 수준에서 어떻게 수백명이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연주할 수 있었을까? 한마디로 무식해서 그랬을 것이다. 무식하면 용감한 법이니까.
또 하나의 요인이라면 아마도 나르시시즘이었을 것이다. '자뻑'으로 세워진 셀프 우상은 타인의 시선 따위에 굴복하지 않는다.

 

많은 시간이 지난 작금에는, 불과 대여섯 명 앞에서도 긴장을 한다. 사소한(하지만 연주자 입장에서는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음의 누락이나 부적절한 뒤내믹, 무엇보다 심각한 '삑싸리(미스톤)'는 자기경멸을 불러온다. 재밌는 것은, 파열음을 유발하는 미스톤을 제외하면 다수의 청중들은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것이다(다수의 청중을 무시하는 게 아니다. 나 역시도 청중들 중의 누군가가 보유하고 있는 전문분야에 대해서는 역시나 둔감할 수밖에 없다). 이 얘기인즉, 나는 청중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 자신의 연주를 평가절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일러, 나는 '식자우환'이라는 말을 쓰곤 한다. 다시 말해 유식하면 겁쟁이가 된다는 얘기다. 겁쟁이는 연주 후에 항상 이렇게 되뇌인다.
이제 연주 같은 건 그만 때려치우자.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다소 아이러니한 표현을 했다. "나 자신을 두고서는, 내 약점밖에는 자랑하지 않겠습니다." 이는 에고(ego)의 못된 측면을 모두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얘기일 테다.
에고의 주 에너지인 나르시시즘을 전면적으로 십자가에 못박아버린 인간이 아티스트로 사는 것은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라도 꽤 어려운 일이다. 그랬다면 당시 수백억 원의 재산을 보유한 존 레논이 "Imagine no possession"따위의 가사를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더불어, 광신도에게 총 맞아 죽을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 이전에 '비틀즈는 이제 예수보다 유명하다'는 얘기도 없었을 것이다).

 

다시 메릴 스트립의 얘기로 돌아가자. 조지아 대학의 키스 켐벨은 그녀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메릴 스트립은 뛰어난 연기력을 갈고닦은 장인이자 이야기꾼인 듯합니다. 실력을 연마하는 데 집중하다보면 자만심은 수그러들기 마련이거든요."
메릴 스트립이 중증 연예인 병자가 되지 않은 것은 유명세 같은 외면적 가치보다 연기라는 내면적 가치에 치중했기 때문이라는 얘기일 테다. 사견이지만, 이런 생각도 든다. 그녀의 경우 퍼스널리티의 시소에서, 오른편의 장인적 가치관과 왼편의 나르시시즘이 적당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지속하여 실력을 연마한다는 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잘 인지하고 있을 때 가능한 일이므로 '자뻑'이 개입할 여지는 별로 없다. 반면, 나르시시즘이 상당부분 결여되어 있다면 그녀는 이렇게 말했을는지도 모른다. 이제 연기 같은 것은 그만 때려치우자.

 

나의 내면적 시소는 언제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까.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든다. 겁먹은 식자가 되는 것보다 용감한 무지렁이가 더 낫지 않을까? 커트 코베인은 최소한 겁먹은 식자는 아니었다. 그의 개판 끝판왕 연주가 근사하게 들리는 이유다.

 

https://www.youtube.com/watch?v=tz1pv3g4YFQ&fbclid=IwAR3buuM5Y0Fw3DVosaAijs7dN_r75wpBX1-Da5gEJtQPUXAcbldeZYkdokwhttps://www.youtube.com/watch?v=tz1pv3g4Y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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