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에서는 인민혁명당 사건의 최종 판결이 확정된 1975년 4월 8일을 '사법 사상 암흑의 날'이라고 선포했으며, 미국 의회에서는 한국의 인권 상황에 관한 청문회가 1974년 하반기에만 세 차례나 열렸다.(중략)
무고한 국민의 피를 너무도 많이 흘리게 한 박정희에게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던 걸까? 후일 그는 정부 요인들 앞에서 "크나큰 실책이라면 인민혁명당 여덟 명을 처형한 것이다"라고 고백했다. 1995년 4월 25일 문화방송이 사법 제도 백주년을 기념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 판사 315명에게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인민혁명당 사건 재판이 '우리 나라 사법 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이었다는 답변이 나오기도 했다.
...무고한 희생자 가운데 한 명인 우홍선의 아내는 "우리들의 남편들은 가족 얼굴 한 번 못 보고 아침 이슬처럼 스러져갔습니다. 저는 남편이 사형당한 이후 신문에 나온 박정희 사진을 그가 죽을 때까지 이가 아프도록 꼭꼭 씹어서 뱉곤 했습니다. 남편 산소에 매주 꽃을 들고 찾아가서 하늘을 향해 "살인마 박정희 천벌을 받아라"하고 외쳤습니다. 한 번 외치면 효과가 없을 것 같아 꼭 세 번씩 외쳤습니다"라는 호소문을 작성하였다. 그런데 지금 박정희를 우상화하면서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열을 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분노의 외침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일까?
-조현연 著, <한국 현대 정치의 악몽-국가폭력>중에서
만화로 보는 인혁당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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