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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메모

재행무상


지난 주, 후배 C군이 술을 기울이는 동안 몇 주 전에 레테의 강을 건너간 한 친구를 회상하더니 나를 보며 넌지시 한마디를 던졌다. 
"형, 건강하시고 오래 사세요...."
아직 지천명의 나이에도 이르지 못한 내게 이 무슨 부적절한 언사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던 것은 그 말 속에 포함된 어떤 심경이 그대로 전해진 탓이었을 거다.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음에도 공교롭게도 근래 (할 일이 없어 '노느니 염불이라도 한다'는 심경으로) 읽은 몇 권의 소설들(스톤 다이어리, 에브리맨, 상실의 시간들)은 모두 하나같이 노화와 죽음을 소재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죽기 전까지는 아직 살아있는 것이고, 죽음이 닥쳐오는 순간에는 이미 죽어 죽음을 인식하지 못하므로 사람은 결코 죽음과 대면할 일이 없고, 따라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에피쿠로스의 개소리는 현실의 충실한 반영인 위의 소설들로 개박살난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대학살이다." <에브리맨>의 한 구절이다.


'재행무상'에 대한 <벙커>강연에서 강신주는 말한다 : 길고양이들은 기껏해야 1~2년밖에 못 산다, 그런 것을 보고 '무상'함을 깨달을 때 비로소 '자비'가 생기는 거다. 고로 '무상'이라는 것은 "아 시발, 졸라 허망해"라는 말로 그치고 마는 허무주의 따위가 아니라는 거다. 
(존재의 무상함을 느끼는 한, 고양이를 끓는 물에 삶아 죽이거나, 마빡에 대못총을 쏘거나, 경기도 어딘가에 산다는 어떤 작가 양반처럼 새끼 고양이를 지하실 벽면에 패대기쳐서 죽이는 행위 따위는 하지 않을 테다.)

이해가 되는 듯하다. 졸라 게을러터진 내가 하루에 2~3시간을 허비해 가며ㅡ때로는 '씨바, 이건 운동이라고는 숨쉬기운동밖에 안 하는 내게도 이로운 일이야'라고 애써 자위해 가면서ㅡ 시베리안개스키 한 마리와 사모예드 두 마리를 존슨빠지게 산책시키는 행위의 동인은 아마도 '무상함'에 대한 일말의 각성 비슷한 것일는지도 모른다. 평균수명이 12년이라니, 얘네들도 머지 않았다는...


그럼에도 나는 왜 불효자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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