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중고 서점에 갔더니 이런 난해한 글이 벽에 붙어있다.
"광활한 우주에서 이미 사라진 책을 읽는다는 것."
이 광활한 우주에서 이미 사라진 책을 대체 어떻게 읽을 수 있는지, 도통 모르겠다. 악보도, 구전도 없이 이미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린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음악을 우리가 들을 수 있을까?
야산에 있는 묘지 앞을 지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여기에 누워있는 분도 한 때는 웃고 떠들고 여행도 다녔을 거다. 즐거운 일이 많았을까? 비본질적인 노동에 치여 사는 와중에도 뭔가 보람같은 것을 느꼈을까? 삶을 내려놓은 이후에는 그 어떤 것이 삶의 연장으로 여겨졌을까?
보다 젊었을 때는 책이든 음반이든 뭐든 남겨야겠다는 욕망ㅡ필멸의 생을 대신할 영원한 대체물에 대한 강박이 있었다. 종교인이 내세를 통해, 범속인이 번식을 통해 자기 DNA를 연장하듯이.
중고 서점에 가니 이제는 절판되어서 과거의 흔적으로만 남은 책들이 있다. 세대가 몇차례 더 바뀌면 그 책들은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소멸과 더불어 흔적조차 지워지고 말 운명이다. 지금의 베스트셀러 또한 극소수를 빼면 유사한 운명일 거다. 어디 책만 그럴까. 영화든 음반이든 다 마찬가지다. 인간 수명을 초월해서 오랫동안 회자되는 것은 언제나 극소수의 작품일 뿐이다('영원히'라고 말하지 않고 '오래동안'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들의 존재 기반인 이 지구조차 영원히 지속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개의 창작물들은 결국 잊힌다.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생자필멸의 법칙은 생자의 창작물에도 해당되는 얘기다. 창작물을 자기 존재의 연장으로 치부하는 건 불확실한만큼의 착각이고 일종의 자기 최면이다. 어차피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애를 낳아 존속시키는 게 낫다. 자신의 창작물이 한 시대를 뛰어넘어 오랫동안 회자되면 그저 어쩌다 주어지는 덤이나 행운으로 여겨 족할 일이지만, 생전에 유화 한 점을 저렴하게 판 것 이외에 아무런 실적(?)이 없는 반 고흐가 사후에ㅡ의식이 소멸해 버려 완전한 무의 상태로 이른 다음에ㅡ 생전의 노고에 대한 대가를 받을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 존재라는 게 그렇지 않습니까. 살아간다는 건 삶을 갉아먹는 거고, 우리가 사랑하는 그 모든 길은 우리가 그 길을 걸어가기 때문에 끝나는 것이겠죠."
ㅡ부다데바 보스 <내 인생의 그녀> 중에서
개인에게 있어 죽음은 전 세계의 소멸이라고 했던가. 의식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호랑이가 가죽을 남기듯 사람이 이름을 남기는 게 무어 그리 대단한 일인가. 그저 이완용처럼 후손을 부끄럽게 할 행위만 하지 않으면 족하다.
이렇게 말하면 숱한 창작자들에게 돌을 던지는 꼴이 될까. 아니, 그보다는 창작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위로 정도는 되지 않을는지.
그러므로 책이든 음반이든 그것을 내는 이유가 먼 미래를 향한 공명심이어서는 한갓 부질없을 뿐이다. 존재의 연장은 일종의 환상이다. 불멸이라는 과대망상의 꿈을 꾸기에 앞서 그저 동시대의 사람들과 공명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쿵따리샤바라>가 언제까지 지속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대체 그게 무슨 상관인가? 플라톤은 <향연>에서 디오티마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그와 같은 불멸의 공훈과 영광스러운 명성 때문에 모든 사람은 무슨 일이든지 하는 것이며, 또 우수한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불사적인 것이야말로 그들이 사랑하는 것이니까요."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나는 이 말에 그리 공감하지 않는다(내가 조로한 것일까?). 우리는 불사적이지 못한 '가사적(可死的)'인 것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소멸될 줄 빤히 알면서도 글을 쓰고 노래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거다. 지속성이 보장된다면야 좋은 일이겠지만, 차라리 불멸 가능성은 내 알 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현명하다.
창작의 이유는 이것밖에 없다. 지금 할 수 있기 때문에 한다. 할 수 있는데 안 할 이유가 뭔가? 논리의 일관성을 추구하면 이런 결론도 가능하다. 어차피 소멸할 운명이라면, 사는 것 자체도 무의미하다. 그러고 보니 진정으로 중대한 철학상의 문제는 자살밖에 없다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난다. 그럼에도…무의미함에도 '살아진다'면, 같은 이유로 무의미하지만 '창작되어진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제는 진부하기만 한 결론을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내가 소설(혹은 곡)을 쓴 게 아니라, 소설(곡)이 내게 쓰게 했다."는 식의. 앞의 말을 철회해야겠다.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하게 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어서 행해지는 것. 그런 점에서 창작은 연애와 닮았다. I can't stop loving you.
나는 이 세상에 은총의 부채를 졌노라.
내게 허여(
빌려쓰고 있노라.
그 공간에서 인류의 존엄을 고양시킬
고고성(
이 세상은 내게 월계관을 씌워줄 의무가 없어…
그리하여 나는 이제 더 이상 불명예라 생각하지 않겠노라.
내 정열이 스민 책들을 고사(
이 세상은 내게 특별한 자리를 내줄 필요는 없어…
내가 오히려 빚을 지고 있음이니.
사족 :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좋은 말이다. 그러나 행복을 위해서라면 야망을 실현시킨 위인이 되려고 애쓰기보다는 '보통의 존재'로 족하는 게 때로는 더 나아 보인다. 조증과 울증의 진동을 큰 진폭으로 유지하는 예술적 천재의 비범한 삶보다는 평상심을 유지하는 평범하지만 행복한 삶이. 그래서 위대한 작가들이 글쓰기를 천형이라고 너스레 아닌 너스레를 떤 것일까? 제 아무리 사랑해서 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한들…문득 프레디 머큐리의 노랫말이 생각난다.
Too much love will kill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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