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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잡글쓰기

조국 교수의 <메멘토 모리>에 대한 변명 아닌 변명

 

 

그는 반듯이 누운 채, 완전히 새로운 방법으로 자신의 인생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그는 우선 하인을 보았고, 다음에는 아내를 보았고, 다음에는 딸을 보았고, 그 다음에는 의사를 보았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간밤에 그가 깨달은 무서운 진실을 뒷받침해 주었다. 그것들 속에서 이반 일리치는 자기 자신―그가 살아온 모든 목적―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순전히 가짜이며, 삶과 죽음을 덮어버린 무섭고도 거대한 기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라는 단편의 한 대목이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 직전에 이르러서야 생전에 보지 못했던 진실을 본다. 위의 깨달음 이전에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기도 한다.

 

“통증이 계속해서 심해졌듯이, 내 인생도 점점 더 나빠졌어. 과거에 내 인생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는 밝은 점이 한 개 있었지만, 나중에는 전체가 점점 어두워지고, 어두워지는 속도도 점점 빨라졌어. (중략)…내 인생 전체가 정말로 잘못 되었다면 어떻게 하지?”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이키루(いきる )>에서 주인공인 시청 소속의 와타나베 과장은 위암 말기 판정을 받는다. 더 이상 직장에 나갈 이유가 없는 그는 밤 문화의 향락에 빠져들지만 허망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어린이들을 위해 놀이터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타성에 젖은 시청 공무원들은 그의 도움 요청을 무시하고 거절한다. 그들로부터 무례를 입은 와타나베 과장을 보면서 부하 직원이 화도 안 나시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난 누구도 미워할 수 없네. 그럴 시간이 없어…”
인상적인 또 하나의 장면. 퇴근길에 저녁노을을 바라보면서 와타나베 과장은 이렇게 말한다. “이 아름다운 걸 30년 동안 모르고 살았다니…”

 

 

 


 

두 편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죽음이 목전에 있으면 누구든 삶을 지금과 같이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통찰이다. 내일 죽는다면 시간을 '비본래적인' 일에 헛되이 보내겠는가? 그러니 언제나 불시의 죽음은 언제나 가능태로 열려있음을 깨닫는 것,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것.
호이징가는 <중세의 가을>에서 “쇠퇴기의 중세만큼 그렇게 죽음에 대한 생각에 큰 강조와 감동을 부여한 시대는 없었다. 그 시대에는 끊임없이 삶 속에서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호소가 메아리쳤다.”고 말한 뒤에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중세 말기의 종교적 사고는 죽음의 장소에서 두 가지 양 극단 밖에는 알지 못했다. 현세적인 것들의 덧없음에 대한 한탄과 영혼의 구원에 대한 기쁨, 이 두 가지만을.” 아마도 이 ‘영혼의 구원’에 대한 기대가 당시 사람들의 악행의 의지에 대한 처방전이 되고도 남았음엔 틀림이 없다. 그러한 일종의 보상 심리가 순수하게 도덕적이냐는 가치 평가는 일단 차치하더라도, 중세 버전의 '죽음에의 선구()'임에는 틀림이 없다. 비록 목적의 차이점은 있지만.

죽음 이후의 삶을 믿지 않으므로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건 종교적이지 않은 혹자에게는 나름 합리적인 판단일 거다(타 생명체를 죽여서 생존하는 인간에게 주어진 평균수명의 삶은 그 자체로 이미 보너스다. 영생까지 바란다고?). 다만 죽음 이후에 삶이 연장되지 않는다는 두려움에 대한 '망각'이라는 처방약에는 부작용이 따른다. 죽음 자체에 대한 망각으로 마치 죽음이 (적어도 내게는)한 없이 지연될 것인 양 인생을 타성적으로 방치하는 것.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세상의 현자들이 흔하게 하는 얘기다. "인간은 죽음과 불행과 무지를 치유할 수 없었기 때문에, 행복해지기 위해서 그것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파스칼의 말이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모든 사고 사건이 오랫동안 회자되는 걸 꺼린다. 예컨대 용산참사, 세월 호 침몰 사건 등등…

 

어쨌거나 ‘Memento mori'가 일깨우는 진실은 자명하다. ‘일 년, 아니 한 달 후에 죽는다고 해도 지금처럼 이렇게 살겠는가?’하는 절실한 물음이다. 내세를 가정하지 않는다면, 주어진 이 생 자체가 이미 시한부이며 소중한 시간들의 집체가 아니겠냐는 물음. 부질없는 것을 쫓아 그 목적의 충족을 위해 타인을 희생하는데 저어함이 없는 삶에 대한 경고. 이반 일리치처럼 목전에 죽음을 두고 “내 인생 전체가 정말로 잘못 되었다면 어떻게 하지?”하며 회한에 젖게 될 삶을 선택하지 말라는 것.


 



조국 교수가 기고문을 통해 현직 대통령에게 ‘Memento mori’를 주문한 것은 이런 차원의 실존적인 요구임에는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어느 자칭 보수 인사께서 조국 교수를 고발했단다. 혐의는 ‘대통령 시해 교사죄’란다. 70년대식 썰렁한 농담인가? 한 편의 웃기지도 않는 찐~~한 삼류 블랙 코미디다.

조 교수를 고발한 보수논객 심상근 씨는 고발장에 ‘살인교사’라는 법률용어 대신 ‘시해(弑害)교사’라는 단어를 썼다. 시해는 ‘부모나 임금을 죽임’을 뜻하는 말이다. 조 교수는 4일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시해라는 단어를 쓴 것만 봐도 이른바 보수논객들의 지적 수준, 정신 상태를 알 수 있다”면서 “검찰에서 당연히 수사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오히려 무고죄로 심 씨를 수사해야 한다.”고 밝혔다.

                                                              (경향신문에서 발췌)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1041125251&code=940100#9155099     

 

 

                                                    

 

무식한 게 죄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무지하지만 순박하기만 한 이에게 누가 돌을 던지랴. 무식하다는 이유만으로 돌을 맞아야 한다면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은커녕 수학의 미적분, 아니 산수도 잘 모르는(어디 무식한 게 이것 하냐겠냐만은) 무식한 나 역시 돌을 맞아야 한다. 게다가 지식이 언제나 올바른 것도 아니다. 누군가 지적했다시피 지식이란 권력의 유지에 일조하기도 한다. 다만 무고한 자를 해치는 지식의 칼이 유해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무지의 칼, 그것도 번드르르하게 시뻘건 날을 세운 부당한 칼날은 유해를 넘어 혐오스럽다. 보수는 혐오의 대상일 수 없다. 다만 보수의 탈을 쓴 ‘자칭 보수 타칭 꼴통’은 그렇다.

나는 어제도 한 시간 동안 너구리 게임을 했고, 두 시간 동안 안 봐도 상관없을 TV프로그램을 봤다. 아무래도 오감이 즐거운 동안에는 ‘memento mori'가 망각되나 보다. 말미의 이 사족(蛇足)같은 글은 아직도 금자 씨의 “너나 잘 하세요.”하는 질책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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