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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리뷰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자작곡 : <벚꽃나무 숲 아래>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저자
카타야마 쿄이치 지음
출판사
지식여행 | 2005-10-1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일본 역사상 최다 판매 신기록 410만부! 국내 겨울연가 제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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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짝 핀 벚꽃나무 숲 아래' 무엇이 있는 걸까?
  타임캡슐? 아니면 오래전의 부치지 못한 연애편지? 아니면 돈뭉치?
 
 정답은 '여자 시체'다.
 어느 남자가 자신의 애인을 업고 벚꽃나무 숲 아래로 가다가 문득 자신의 등에 업힌 것이 애인이 아닌 다른 존재임을 느낀다. 그것은 바로 '온 몸이 보라색에 얼굴이 커다란, 그리고 입은 귀까지 찢어져 있고, 초록색의 꼬불꼬불한 머리카락의 노파'였던 거다. 남자는 필사적으로 등에 업힌 것을 바닥에 패대기치고는 목 졸라 살해한다. 문득 정신을 차리자 그의 발치에는 노파가 아닌, 자신의 애인의 시체가 놓여있다. 그 시체 위로 수북히 벚꽃이 쌓이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남자는 벚꽃을 털어내려고 한다. 벛꽃을 털어낸 순간 여자의 시신은 온데간데 없다..그리고 쌓인 벚꽃 잎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 그의 손도, 몸도 사라져버리고 차가운 허공만이 남는다.

 이상은 사카구치 안고(1906~1955)의 <활짝 핀 벚꽃나무 숲 아래>라는 단편 소설의 의미심장한 마지막 장면의 묘사다. '벚꽃나무 숲 아래' 시체가 있다는 얘기는 이와이 슈운지 감독의 영화 <러브레터>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주인공 후지이 이즈키는 도서관 사서 친구에게 와타나베 히로꼬로부터 받은 편지를 읽어주며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이즈키 : (와타나베 히로꼬로부터 온 편지를 읽는다)'후지이 이즈키씨께. 오늘 돌아오는 언덕길에서 벚꽃의 꽃봉오리가 부풀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쪽은 슬슬 봄기운이 느껴지네요. -와타나베 히로꼬'
 누시 : 이상하다...
 이즈키 : '카즈이 모토지로'의 책에 있지?
 누시 : '벚꽃나무 밑에는 시체가 묻혀있다.'
 이즈키 : 또 '사카구치 안고'의 책에도 있잖아.
 누시 :  '활짝 핀 벛꽃나무 숲 아래.'
 이즈키 : 그래, 그래. 역시 그런 거야...벚꽃이라는 것은 그런 무서운 의미가 있어....

 


  
 벚꽃나무와 시체....정말 기묘한 조합이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봄이 한창인 4월에 피는 벚꽃은 계절이 그러하듯 죽음보다는 소생의 이미지에 가까우니까. 벚꽃의 상징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양에서 벚꽃은 일반적으로 봄, 순결 처녀의 상징으로, 그리스도교 전설에서는 그 중의 버찌가 마리아의 성목이 된다. 마리아가 이 열매를 남편이 요셉에게 구해서 거절당했을 때, 가지가 마리아의 입안에까지 처졌다고 하며, 거기에서 꽃은 처녀의 아름다움에 열매는 천국의 과일로 비유되었다. 또한 영국에서는 한 알씩 먹으면서 결혼할 수 있는지 여부를 묻는 연애점이 있다. 꽃말은 <교양>, <정신미>, 일본의 벚꽃은 <부와 번영>, 열매가 두 개 붙은 것은 <행운>이나 <연인의 매혹>의 상징이다.  

                                 -종교학 대사전에서 발췌

 그 어느 것도 '죽음'의 이미지인 것은 없다. 일본에서조차도 <부와 번영>이라는데, 어찌하여 사카구치 안고는 '번영'과 상반된 퇴락으로서의 '죽음-시체'를 애기한 것일까? 일본에는 이런 내용의 설화가 있었던 것일까? 사카구치 안고는 소설의 초반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벚꽃이 피면 사람들은 술병을 들고 나가서 경단을 먹기도 하고 꽃나무 아래를 걸어다니며 경치 좋네, 봄이 왔네 하면서 기분이 한껏 들뜬다고 하는데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어째서 거짓말인가 하면 벚꽃나무 아래로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술에 취하고, 먹고, 토하고, 싸우기 시작한 것은 기껏해야 에도 시대부터 생겨난 풍습일 뿐, 그보다 더 옛날에는 벚꽃나무 아래를 무서운 곳이라고만 생각했지 절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요즘에는 벚꽃나무 아래에 사람들이 모여서 꽃구경을 하며 술도 마시고 싸우기도 하기 때문에 흥겹고 떠들썩한 풍경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벚꽃나무 아래에서 인간을 빼버리고 나면 아주 무서운 경치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노(일본의 전통 가면극)에서도 어떤 엄마가 사랑하는 자식이 유괴당한 뒤 자식을 찾다가 미쳐 벚꽃이 활짝 핀 숲속으로 들어왔다가, 여기저기 둘러볼 때마다 꽃그늘 속에서 자식의 환영을 보고는 미쳐서 죽어 그대로 꽃잎 속에 묻혀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벚꽃나무 아래에서 사람의 모습을 빼버리면 정말 무서운 풍경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게 하는 벚꽃이여.
                                -바쇼(1644~1694)
 
 동의할 수 있는가? 나는 인적이 없는 벚꽃나무 숲에서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느끼면 느꼈지, 공포를 느낀 적은 한 번도 없다. 벚꽃나무 숲을 기이한 이미지로 덧칠하는 과거의 일본인의 관점은 특이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상상력을 조금만 동원하면 흩날리는 벚꽃 잎에서 죽음의 이미지를 읽어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만발한 벚꽃을 보면서 대개는 번영의 이미지를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 기실 꽃이 가지에 머무는 건 기나긴 세월에 비하면 찰나와도 같은 것. 어떤 이에게는 급속도로 흩날리며 져버리는 벚꽃의 이미지가 '찰나와 같은 생의 소멸'로 다가오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이들에게 있어 생명의 약동이 시작되어야 마땅할 봄날에 시들어 떨어지는 벚꽃잎은 죽음에 이르는 절망, 혹은 박명과 요절의 이미지에 다름 아니다. 어떤 시인이 말했지 않은가.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어떤 외국인 미학 연구자는, 일본에는 덧없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느끼는 미의식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컨대, 벚꽃이 아름다운 까닭은 벚꽃이 피는 시기가 일시적이고 곧바로 지는 덧없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그런가 하면  지금 이 순간밖에 없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 아름다움이 언젠가 사라져 버린다고 해서 아름다움이 불완전해진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쓰치야 겐지, <괴짜교수의 철학강의>중에서

 

(카미카제 특공대원으로 전사한)사사키 하치로오는 만개한 산사쿠라를 칭송한 와카야마 보쿠스이의 유명한 노래 두 수를 인용하면서 사쿠라 찬미를 계속한다. 그런데 정작 그 자신이 노래한 것은 철이 지난 사쿠라의 비애였다. 1942년 3월, 그는 만개한 사쿠라를 칭송하고 그것을 젊음이나 청춘과도 같이 생각한다.()사쿠라꽃은 확실히 젊음, 여성, 아름다움, 그리고 청춘을 즐기는 자신의 은유로 쓰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사쿠라꽃에서 스치듯 짧게 지나가는 봄의 허무함을 느끼고 그것을 비애와 결부시키고 있다.
                       -오오누키 에미코, <학도병의 정신지(精神誌)>중에서



 덧없음의 아름다움이 美의 이데아는 못 될 것이다. 그럼에도 그 찰나의 덧없음은 불꽃놀이처럼 아름답고도 아리게 다가온다. 불꽃이 사그라지듯이 지난날의 추억들이 희미해지지 않는 한, 현존하지 않음으로 인한 아름다움은 여전히 관념 속에서 살아있다. 슬픔을 동반한 채.

 



벚꽃이 아름답게 수놓아진 작품을 기억한다. 영화로도 제작되어진 카타야마 료이치의 소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영화는 흥미유발용 군더더기를 삽입하는 통에 경박해졌지만, 원작 소설은 그 단순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장의 아름다움 때문에 감동적이다. 주인공 '사쿠'는 백혈병으로 여자 친구인 '아키'를 잃는다. 화장터에서 사쿠가 아키를 태운 연기를 바라보는 장면을 카타야마 료이치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시신이 태워지는 동안 어른들에게는 술이 돌아갔다. 나는 혼자서 건물 뒤쪽으로 나가보았다. 산을 막아놓은 제방이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제방에는 갈색의 마른 풀들이 나 있다. 쓰레기장 같은 곳에 거무스름한 재가 버려져 있었다. 너무나 고요해서 사람의 목소리도,새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귀를 잔뜩 기울이면 아키를 태우는 보일러의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나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붉은 벽돌의 목이 긴 굴뚝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한 사람을 태우는 연기가 가만히 겨울 하늘로 퍼져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한참 동안 그곳에 서서 연기의 행방을 눈으로 쫓았다. 연기는 검거나 하얗게 높이 더 올라갔다. 마지막 연기가 쟂빛 구름에 섞여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내 마음속까지도 완전히 텅 비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쿠의 할아버지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위로한다.

 "인생에는 실현된 것과 실현되지 않은 것이 있다....실현된 것이라면 인간은 금새 잊어버리지. 그런데 실현되지 않는 것은 언제까지고 소중하게 가슴 속에서 키워간다. 꿈이라든가 동경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모두 그러한 것들이지. 인생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실현되지 않은 것에 대한 생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실현되지 않은 것이 있다 해도 아무 가치 없이 남겨지는 게 아니다. 사실은 아름다움으로 이미 실현되어 있는 거란다." 

 그러나 그것은 허망한 아름다움이다. 사쿠에게는 아키와의 공존 가능성이 현재에도 미래에도 없다. 거칠게 말해서 아키와의 공존에의 소망을 '욕망'이라고 정의해보자(여기서 '욕망'은 성적 욕망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뿐더러, 부정적 의미로 사용된 것만도 아니다). 사쿠에게는 아키가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란 당연히 전무하므로 좌절된 욕망만이 남아있다. 할아버지는 좌절된 욕망을 '실현되지 못한 것으로 인한 아름다움의 실현'이라는 말로 위로한다. 그렇다면 역설적이게도 인간에겐 실현가능성이 전무한 욕망의 좌절이 '아름다움에의 실현'으로 남는다는 말이다. 
 
 

 

다시 사쿠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할아버지는 왜 '실현되지 못한 것의 아름다운 실현'을 얘기한 것일까? 아마도 할아버지는 연륜으로 '실현된 것에 대한 쇼펜하우어的 권태'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자의적인 해석이 될까?
  
 저 먼 지평선은 마치 미래와도 같구려! 어렴풋한 하나의 커다란 세계가 우리들의 영혼 앞에 가로 놓여 있소...그리하여 우리들은 동경하오. 아아!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바쳐 단 하나의 커다란 환희로서 자기 자신을 충만시키고 싶다고....그러나 우리가 막상 그리로 달려가 '거기가 바로 여기'가 될 때, 모든 것은 본래대로가 아니겠소?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중에서


 사쿠의 할아버지의 말을 다시 한 번 음미해보자. "인생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실현되지 않은 것에 대한 생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현존하지 않고 관념으로만 남은 가치는 허망하고 아리다. 그리고 그 아리고 허망한 것에는 '거기가 바로 여기'가 되지 않는 미답(未踏)의 아름다움이 있다.

 



 

과거의 일이 일어난 그 장소에 서면 공간적인 거리는 제로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시간적 거리만이 순수한 형태로 부상한다.

그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동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과거는 어디로 가버렸을까?'라고 묻게 되는 것이다.                       

                         -나카지마 요시미치,<시간을 철학하다>중에서

 

 깊은 상실감으로 인한 서늘한 슬픔은 집착의 다른 이름인 것일까? 사쿠는 아키의 뼛가루 일부를 오랜 세월 동안 조그만 유리병에 넣어 다닌다. 그리고 소설의 아름답게 묘사된 마지막 장에서 사쿠는 '과거의 일이 일어난 그 장소'인, 벚꽃이 흩날리는 중학교 운동장에서 아키를 떠나보낸다. 하얀 벚꽃잎과 함께 부유하는 아키의 하얀 뼛가루. 

계속해서 살아나가는 힘은 아마도 집착을 털어버리는 것으로부터 올 것이다.

 '이곳을 둘이서 다녔던 것이다.' 나는 가슴속에서 말해보았다.
 '여기에서 아키와 만났다.'
  벌써 몇 십 년도 전의 일 같은 생각이 든다. 시간을 뛰어넘어 아주 먼 옛날의 일로도 생각된다....그때는 벚꽃 같은 건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벚나무가 심겨져 있는 사실조차 필시 깨닫지 못하고 졸업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벚나무가 가로수를 이루고 있다니.
 ............................
 상냥한 그 마음은 지금 어디로 간 걸까. 아키라는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었던 아름다운 것, 좋은 것, 섬세한 것은 어디로 간 것일까? 한밤의 설원을 달리는 열차처럼 밝게 빛나는 별 아래를 지금도 계속 달리고 있는 걸까? 어디라고 방향도 정하지 않고 이 세계의 기준으로는 잴 수 없는 방위를 따라 혹시 언젠가 여기에 돌아오는 일도 있을까?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로 오랜 시간 찾지 못했던 물건이 어느 날 아침 문득 원래 두었던 장소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옛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잃어버렸을 때보다 오히려 새롭게 보이기도 한다. 마치 누군가 모르는 사람이 소중하게 간직해두고 있었던 것처럼. 그런 식으로 그녀의 마음도 다시 여기로 돌아올 수 있을까?
 윗옷 주머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내가 살아있는 한 몸에 늘 지니고 있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분명 없을 것이다. 이 세계에는 처음과 끝이 있다. 그 양끝에 아키가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언젠가  여기서 아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질녘, 교정 구석의 철봉을 기어올라가는 그녀를....하지만 그것이 확실한 기억인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바람이 불고 꽃잎이 흩날렸다. 꽃잎은 발밑까지 날아왔다. 다시 손바닥에 있는 유리병으로 눈길을 돌렸다. 작은 불안이 가슴을 스쳐갔다. 후회하지 않을까? 후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아름다운 벚꽃 눈이 내린다.
천천히 병의 뚜껑을 돌렸다. 앞일은 더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병의 입구를 하늘로 향하게 하고 팔을 있는 힘껏 뻗어 커다란 곡선을 그렸다. 하얀 재가 가는 눈발처럼 노을진 하늘을 떠돌았다. 바람이 불었다. 벚꽃 잎이 흩날리고 그 꽃잎에 섞여 아키의 재는 이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만물이 소생하기 시작하는 봄날에 벚꽃 잎들은 낙화를 시작한다. 그것은 17세에 생을 다해 벚꽃 잎들 속에 섞여 함께 순결한 흰색으로 흩날릴 수밖에 없는 아키의 이미지다.
 철학에서 흔히 말하는대로 '영원의 상(sub specie aeternitatis)'에서 본다면, 천수를 누린다한들 장구한 우주의 지속에 비하면 우리들 생이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차피 박명의 삶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한다면  요절한 사람들에게 실례가 되는 일은 아닐까? 예컨대 전세(戰勢)가 기울어 더 이상 목숨을 연장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학도병들이 죽기 직전에 이 얘기를 듣는다면 그것은 염장질이 될까, 아니면 한 줌의 위로라도 될까?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의하면 히파니스 강에는 하루밖에 살지 못하는 작은 벌레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아침 여덟시에 죽은 것은 청춘의 시기에, 그리고 저녁 다섯 시에 죽은 것은 늙어서 죽은 셈이 된다. 이 짧은 순간을 두고 행복하니 불행하니 하고 생각한다면 누가 비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 인생을 영원에 비교해 보라. 좀더 살거나 덜 살거나 하는 따위는 우스운 일이 아니겠는가?......(중략)......그대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존재는 똑같이 삶과 죽음으로 갈라져 있다. 그대가 이 세상에 나온 첫날은 삶으로 향하는 첫걸음인 동시에 죽음으로 향하는 첫걸음인 것이다.

                                     -미셸 드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회자정리, 생자필멸-이 세계에 처음과 끝이 있는 것, 그리고 일시적으로 피었다가 곧바로 지는 벚꽃의 덧없음을 수긍할 때 봉인된 집착이 유리병 밖으로 풀려나는 것처럼, 박명에 불과한 삶을 응시함으로써 우리는 덧없는 욕망과 슬픔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이런 깨달음이 내게 가능할까?)

 


 
 ....뿌옇게 흐린 공기와 떨어지는 화려한 벚꽃의 이미지가 뒤섞이면서 봄은 가을보다 한층 더 인생의 덧없음을 실감케 하는 계절이다. 예를 들면 '누각에 앉아 봄날의 꽃 잔치 벌이나...' '아아, 옥배에 꽃잎 받아...'와 같은 노래를 들으면 내 청춘의 봄날에 느껴야 했던 그 허망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뿌연 아지랑이 피어나는 봄이야말로 가장 꿈에 가까운 이미지로 가득하다....

...그리고 벚꽃이 떨어지는 모습은 매화와는 달라서 강한 시간 이미지를 형성한다. 한꺼번에, 더욱이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른 속력으로 꽃잎은 자신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 떨어져내려, 우듬지에서 지면까지의 공간을 가득 메운다. 이렇게 난무하는 꽃잎의 운동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시간의 경과를 읽어내고 또 자연스럽게 그 운동에다 시간을 겹쳐서 이미지 하는 것이 아닐까.

.....인생을 꿈에 비유하는 것을 단순한 착각이나 우연으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거기에는 시간에 대한 어떤 근본적인 통찰이 깔려 있다....모든 꿈은 '꾸었다','보았다'는 형식으로 의미가 부여된다. 그리고 인생은 아무리 파란에 미친 것이라 해도 사실은 이 짧은 현재라는 시간을 벗어나 한결같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 과거에 속해 있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 대부분을 '이미 존재하지 않는'시간으로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나카지마 요시미치, <시간을 철학하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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