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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리뷰

남아 있는 나날

 


남아 있는 나날

저자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0-09-17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젊은 나날의 사랑은 지나갔지만, 남아 있는 나날에도 희망은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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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

 

1958년, 스티븐스는 영국 시골로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하며 그는 1930년대 국제회의 장소로 유명했던 달링턴 홀, 그리고 주인 달링턴 경을 위해 일해왔던 지난 날을 회고해본다. 당시 유럽은 나찌의 태동과 함께 전운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있었다. 스티븐스는 그에게 충성을 다하지만, 독일과의 화합을 추진하던 달링턴은 친 나찌주의자로 몰려 종전 후 폐인이 되고 만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자신의 맹목적인 충직스러움과 직업 의식 때문에 사생활의 많은 부분이 희생되었음을 깨닫는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지도 못했고, 매력적인 켄튼의 사랑을 일부러 무시했고 몇년 동안 켄튼과 스티븐스의 관계는 경직되어왔다. 내면에서 불타오르는 애모의 정을 감춘 채 스티븐스는 오로지 임무에만 충실해온 것이다. 결국 그의 태도에 실망한 그녀는 그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야 만다.

지금 스티븐스는 결혼에 실패한 켄튼에게로 향하고 있다. 그녀를 설득시켜 지난날 감정을 바로잡아 잃어버린 젊은 날의 사랑을 되찾기위해. 그러나 이러한 희망마저 무산되고 그는 새주인에 의해 다시 옛모습을 되찾게 된 달링턴성으로 혼자서 외로이 돌아온다. 지난날의 온갖 영욕을 이겨내고 꿋꿋이 살아남은 달링턴성은 어쩌면 자신과 조국 영국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네이버 <영화>에서 발췌.

 

 

                                                            


 

자신이 일평생을 바쳐서 지녀온 생의 의미가 황혼 녘에 무가치한 것으로 판명된다면, 그에게 남아있는 나날은 무슨 의미를 지니게 될까? 가치의 전복에서 남아있는 날들은 구원될 수 있을까? 하나의 신념을 위해서 어쩌면 자신이 추구할 수도 있었던 무수한 가치들을 희생한 삶이 있다. <남아있는 나날>의 주인공 스티븐스가 그렇다. 그는 영국의 귀족인 달링턴 경의 집사로, 그의 모든 생의 가치는 자신의 주인을 최대한으로 섬기는 것과 자신의 직책을 단 하나의 실수도 없이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에 있다. 한 하녀를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집에서 쫓아내려는 주인의 행위에 대해서도 그 어떤 만류도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방관을 질책하는 여집사 켄튼에게 이렇게 항변한다.


"나리께서 결정하신 일이니 당신이나 나나 논할 것이 없어요.....(중략)......당신이나 나의 위치에서는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수두룩해요, 유대 민족의 본질 같은 것도 그 중 하나이고. 반면에 우리 나리는 무엇이 최선인지를 판단하실 수 있는 좀 더 나은 위치에 계신다고 감히 말하고 싶소."

 

켄튼은 그에게 이렇게 질책한다.

 

 "당신은 왜, 왜, 왜 항상 그렇게 시치미를 떼고 살아야 하죠?"

 

스티븐스의 독백은 그 이유를 말해준다.

 

<...그 당시 우리에게 세상은 이 저명한 저택들을 중심축으로 돌아가는 하나의 바퀴였으며, 거기서 내려진 막강한 결정들이 부자이든 가난뱅이든 바깥 주위를 돌고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로 퍼져 나간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작게나마 기여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슴에 품고 있었으며, 직업인으로서 그 소망을 실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문명을 떠맡고 있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신사를 섬기는 것이라고 보았다.

 

...자신이 봉사해 온 세월을 돌아보며, 나는 위대한 신사에게 내 재능을 바쳤노라고, 그래서 그 신사를 통해 인류에 봉사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위대한' 집사가 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집사의 의무는 훌륭하게 봉사를 하는 것이지, 중대한 나랏일에 끼어드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실제로도 그런 큰 문제들은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의 이해 수준을 뛰어넘는 차원이기 마련이어서 우리 분야에서 진정 이름을 떨치고 싶은 사람이라면 자기 영역의 '현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최선임을 깨달아야 한다. 다시 말해, 문명 사회의 운명을 실제로 좌지우지하는 저 위대한 신사들에게 가장 훌륭하게 봉사하기 노력하는 것이 최선인 것이다.

 

...주인에 대해 자기 나름의 '확고한 소신'을 형성하고자 끊임없이 애쓰는 집사의 경우, 훌륭한 전문가의 필수 조건에 속하는 자질, 그러니까 '충성심'면에서 부족해질 수 밖에 없다는 데 있다.

 

...나는 다만 피할 수 없는 불변의 진실을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오늘날 세상의 거창한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결코 있지 않다는 것, 따라서 현명하고 존경스럽다고 판단되는 주인에게 신뢰를 바치고 우리 능력이 닿는 한 열과 성을 다해 모시는 것만이 최선의 길이라는 사실 말이다.>

 

 

                                            

 

        

“여러분들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의 중심축에서 우리의 봉사를 받는 저 위대한 신사들의 손에 운명을 맡길 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건 엄연한 현실이다.” 이것은 에리히 프롬이 말한 ‘자유로부터의 도피’다. 불안한 개인이 스스로 정체성을 권위있는 타인에게 위임하여 거짓 평안을 얻는 것.

 

<파시즘, 나치즘, 스탈린주의의 공통되는 성격은 원자처럼 세분된 개개의 인간에게 새로운 피난처와 안전을 제공해 주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체제는 소외의 궁극적 결과다. 항상 자신이 무력하고 무의미하다고 느끼도록 되어 있는 개인은 그가 복종하고 숭배해야하는 지도자, 국가, 조국 에 모든 힘을 바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개인은 자유로부터 우상숭배로 도피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 <건전한 사회>중에서.


<신학적 및 세속적 용어로 '죄'라는 말은 권위적 개념과 결부된 개념이다. 그리고 그 구조는 인간의 중심이 그 자신에게 있지 않고 그가 복종하는 권위에 있다는 점에서 소유적 실존 양식과 부합된다. 이때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요인은 우리 자신의 생산적 활동이 아니라, 수동적 복종과 그 대가로 권위 측에서 베푸는 관용이다. 우리는 우리가 신뢰하는 하나의 (세속적이거나 종교적인) 지도자를 소유하며, 그럼으로써 안전을 소유한다.단,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인물로 있는 전제에서 말이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중에서.

     

유대인 학살의 핵심인물인 아돌프 오토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지켜 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그녀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이히만은 이아고도 멕베스도 아니었고, 또한 리처드 3세처럼 "악인임을 입증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그의 마음과는 전혀 동떨어진 일이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떤 동기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상관을 죽여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략)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철저한 무사유였다.>

                                                                      

우리는 여전히 도처에서 '철저한 무사유'의 결과들을 본다. 비판의식을 결여한 채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태도의 근저에는  자기존재감의 위임 이외에  타 존재의 고통에 대한 불감증이 놓여있는 건 아닐까? 타 존재의 고통에 민감하다면, 어떻게 "그들이 망루에서 불타 죽은 것은 현행법을 어겼기 때문이다."는 말로 타자의 죽음에 침을 뱉을 수 있을까?

우리는 타자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체현할 수는 없다. 그래서 더욱 고독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에겐 타자의 고통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는 '상상력'이 있다. 이 상상력이 나와 타자의 간극을 좁혀준다. 버지니아 울프의 말대로 우리가 겪은 실패는 "상상력의 실패, 공감의 실패"인 것이다.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이 현실적인 이유로 비판 의지를 봉인하거나, ‘철저한 무사유’로 부당한 권위에 종속되는 한 결코 자유스러울 수 없을 뿐더러 악을 생성하는 커다란 힘의 토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아마도 저자인 가즈오 이시구로는 말하고 싶었으리라.

가즈오 이시구로는 1954년에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1960년으로 영국으로 이주했다. 1982년에 <창백한 언덕 풍경>으로 휘트브래드 상을 받으며 데뷔했고, 이 작품으로 영국의 권위 있는 부커상을 수상, 이후 <우리가 고아였을 때>나 <나를 보내지마>등 여러 작품들이 독자와 평단의 극찬을 받으며 현재 영문학의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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