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문을 열었더니 1.5m 지점에 떨어져 있는 개똥이 눈에 들어온다. 개가 많은 우리집에서는 흔한 게 개똥이기는 한데, 문제는 발견된 이 개똥의 절반 가까이가 짓뭉겨져 있다는 거다.
혹시나 해서 신고 있는 슬리퍼의 바닥을 들춰 봤다. 이상 없다. 분명 멍군의 소행이다. 짓눌림의 정도로 판단컨대 소형견들은 무방하다. 큰놈들 짓이다. 그 커다란 발바닥으로 거실의 장판 위에 발도장을 찍으며 돌아다닐 생각(과 더불어 시베리안개스키의 경우 버릇 없게도 침대 위에까지 올라온다는 생각)을 하자 살짝 짜증이 든다.
하지만 의외로 거실 바닥에는 아무런 족적도 남겨져 있지 않다. 네 마리나 되는 '큰놈'들의 발바닥(도합16개)을 살펴봤지만 비교적 굳은 똥이어서 그런지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어쩌면 '가시는 걸음걸음 사뿐히 즈려밟고 가'셔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한번은 어떤 멍군이 똥을 '즈려밟는' 순간, 반사적으로 발을 움츠리는 걸 목격한 적이 있다).
발바닥에서 시각적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면 남은 방법은 후각을 이용하는 것밖에 없다. 하지만 이 방법은 좀 곤란하다. 도합 열여섯 개의 개발바닥에 코를 들이대며 킁킁거리는 인간영장류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된다. 이것은 사람이 개를 물었다는 행위만큼이나 역할의 완벽한 전도다.
범행(?)의 증거를 확보하는데 실패한 나는 그냥 마구잡이식으로 족치기로 결심한다. 족친다고 해서 때린다는 뜻은 아니고, 그저 개들이 싫어하는 족욕을 시키려는 것 뿐이다. 하지만 정작 도합 16개의 발바닥을 씻기려니 귀차니즘이 스멀스멀 피어 오른다.
귀차니즘이 스며들 때 간사한 인간영장류는 이 청결의 의무를 회피할 정신적/현실적 근거를 찾는다. '발을 젖게 하면 피부병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병리학적 근거로부터 '오히려 적당히 지저분한 환경이 건강면에서 더 이로운데, 지나치게 청결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의 경우 외려 병원균에 대한 면역력이 떨어진다'는 면역학적 근거까지 동원해 가며.
결국 안 씻기고 그냥 내버려 둔다. 최후의 논리적(?) 근거는 이렇다. '어차피 개똥에 앉았던 똥파리들도 (식기 포함) 집안 곳곳을 밟고 다닐 텐데 뭐.' 왜 이럴 때는 단위면적당 분포되는 병원균의 수를 비교하여 헤아리지 않는 것인지 궁금하다.
내가 지껄인 거개의 개솔들 중에 그나마 뼈가 있는 말은 아마도 이것일 테다. "개와 더불어 산다는 것은 개똥과 같이 산다는 것이다." 대도시 기준, 한 달에 약 백여 마리 정도 발생하는 유기견의 전 주인들은 아마도 평상시에는 "개를 좋아한다"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녔을 테다. 좋아하지 않는다면 돈을 주고 입양했을 이유가 없을 테니까. 아마도 그 '좋아하는' 개를 유기하는 순간, 인간영장류는 아마도 다음의 생각으로 스스로를 구원했을 거다.
'누군가 나 대신 잘 키워줄 거야.'
물론 이 생각은 사실이다. 유기한 그 인간을 대신하여 유기견보호소 관계자들이 약 보름 정도, 그리고 종종 '안락사'로 순화되는 집단 '폐기'의 과정을 거친 이후에는 하느님이 열심히 돌보고 계시다. 유기동물의 90%는 아마 이럴 것이다.
개와 산다는 것은 온전히 '귀여움'의 세상에서 사는 것만이 아니라 때로는, 아니 꽤 자주 똥으로 대변되는('똥'으로 '대변'된다니, 재미있는 말 아닌가) 불결함과 귀찮음의 세계에서 공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개똥'으로 대변되는, 존재의 마이너스적 측면을 간과하거나 애써 축소하여 발생한 최악의 행태가 바로 유기일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욕실에서 미끄러지는 통에 욕실 바닥에 큰 대자로 자빠진 적이 있다. 자빠지는 순간 반사적으로 두 팔을 뻗는 낙법을 행하여(?)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자빠진 직후 오른쪽 팔뚝 언저리에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을 때 나는 그것이 통증에서 오는 열기가 아님을 금방 간파했다. 그것은 개똥, 그것도 수분이 충분하여 마치 카레처럼 반짝반짝거리며 질척이는 그것이었다. 어쩌면 후방낙법의 결과로 몸통이나 안면에도 카레가 튀었을지도 모른다.
당시에 나는 그래도 "그래, 개랑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지. 때로는 똥범벅이 되어도 긍정하며 사는 것"이라고 위무하며 중얼거렸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단지 두 마디를 외쳤을 뿐이다.
"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