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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잡글쓰기

엔트로피의 세계




간혹 이런 질문을 받는다.
"왜 교회에 안 다니세요?"
그러면 이렇게 대답한다.
"예전에는 다녔었는데 지금은 안 다녀요."
"왜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고픈 충동을 느낀다.
'악어 때문에 안 다녀요.'
물론 악어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다.


예전에 교회 다닐 때 자주 불렀던 찬송가가 떠오른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창세기의 이런 구절을 연상시키는 가사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런데 악어를 보면 보기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게 문제다. 내가 피식자인 들소에게 연민을 느끼는 이유겠지만, 악어의 외관도 한몫을 한다. 호러무비에 나오는 악마들의 눈깔과 이빨이 그 모양인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오죽하면 이브를 꼬드긴 동물로 뱀을 꼽았겠는가. 
파충류에 대한 혐오를 느끼는 게 당연한 듯 보이지만 저들 입장에서는 다소 억울하다. 참새 입장에서는 고양이가 악어고 돼지나 닭 입장에서는 내가 악어에 다름 아닐 테니까.


개나 고양이를 학대하는 걸 증오하는 내가 과거에 뱀을 군화발로 밟아 죽인 일이 있다. '뱀은 독이 있으니까...'하고 정당화해봤자 스스로를 속이는 것밖에는 안된다. 진짜로 그 뱀이 독사라는 걸 장담할 수 있었다면 밟아 버리기 전에 36계 줄행랑을 쳤을 테니 말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목숨을 빼앗긴 뱀은 군대 고참들에 의해 PX의 난로 위에서 구워진 후 그들의 일부가 되었다.


어제, 그러니까 2015년의 마지막 날에 마크 롤랜즈의 <철학자가 달린다>를 완독했다. 인상적인 대목들 중 하나는 열역학 제 2법칙인 엔트로피를 언급한 부분이다. 흔히 <무질서도>를 의미하는 엔트로피란, 폐쇄 체계는 시간이 가면서 점차 무질서하게 된다는 법칙이다. 예컨대 인간이라는 폐쇄 체계인 '나'를 방안에 가둬 놓고 아무런 에너지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면, 나는 점차 무질서하게 형태가 변해갈 거다. 죽어서 썩어 문드러진다는 얘기다. 엔트로피의 파괴 행위를 피하려면 당연히 에너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열역학 제 1법칙에 의해 에너지가 새로이 생성되어 제공되는 일은 불가능하므로 어디선가 에너지를 끌어와야 한다. 내가 온전히 존재하려면 타존재의 에너지 박탈이 전제되어야 한다. 쉽게 말해 나를 위해 돼지는 죽어줘야 한다는 얘기다. 마크 롤랜즈는 이렇게 말한다.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나는 에너지의 전환자일 뿐이다. 즉, 다른 누군가의 에너지를 끌어와 내것으로 만드는 존재인 것이다." 그는 이런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의 법칙을 '파괴와 죽음의 제로섬 게임'으로 명명한다. 그리고 묻는다. "에너지의 제로섬 경쟁에서 사랑이 설 자리가 있는가?"


마크 롤랜즈는 자신의 어린 아들이 미래에 볼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얘기를 건넨다.

"아들아, 너와 나는 모두 벌레들이란다. 결국은 우리의 육신도 모두 썩어 (또다른)벌레의 밥이 될 거야. 우리의 불멸의 나선은 디옥시리보핵산(DNA)이 아니란다. 우리는 열역학 법칙을 형상화한 존재이며, 우리의 불멸의 나선은 벌레야. 그러나 짧은 기간이나마 우리는 벌레보다는 좀 더 나은 뭔가가 될 기회가 있단다. 사랑을 할 때 우리는 벌레보다 나은 존재가 된단다. 사랑을 하는 것은 우리를 형성한 법칙을 벗어나는 것이니까. 물론, 그 법칙을 벗어날 수는 없단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그 정신을 거부할 수는 있어.
(중략)
사랑하는 것은 우리를 만든 (엔트로피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란다.(...) 사랑은 우리 모두 결국은 나쁜 결말을 맞으리란 것을 인정하는 것이란다. 우리는 잠시 궤도를 벗어나지만, 곧 밀려오는 엔트로피의 파도가 집어 삼켜 버릴 것을 말이야.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한배를 탔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기도 하단다.(...)우리가 누구에게 혹은 무엇에게 베푸는 모든 친절한 행동은 우리를 형성한 법칙의 정신에 도전하는 것이야. 악보다 선을 더 중시한다면 우리를 형성한 법칙의 정신에 도전하는 것이지."(후략)


마크 롤랜즈 말대로 우주상의 모든 것들은 엔트로피의 지배를 받는다.  주어진 수명 동안은 이 엔트로피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악어는 들소를 잡아 먹어야 하고 나는 닭고기를 먹어야 한다.

생각해 보면 악마는 악어가 아니라 '나'일지도 모르겠다. 윤리를 아는 존재이면서도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인간만의 공리를 위해 사실상 동물학대에 일조하고 있으니 말이다. 단위 면적 당 많은 수의 닭을 사육할수록 닭고기 값은 저렴져서 인간의 공리에 일조하지만, 닭들에게는 지옥이 된다. 돼지도 마찬가지다.


인간도 먹고 살기 힘들어 죽겠는데 뭔 닭 걱정을....이런 지적을 하는 분들도 있을 테지만, 사실 이런 탈-엔트로피를 위한 경쟁은 인간 무리들 사이에서도 연장되어 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식인종처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착취'라는 방식으로는 그렇다. 물론 남의 피땀을 쥐어짜지 않아도 엔트로피의 지배에서 어느 정도의 한계수명까지는 그럭저럭 벗어날 수는 있다. 하지만 누군가 지적했듯 인간 불평등의 기원을 취득한 음식물을 훈제 등의 방법으로 장시간 보관, 축적할 수 있게 됨과 동시에 타인의 것을 빼앗는 행위의 확산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화폐경제가 지배적이게 되었을 때는 이 갈취 행위가 점차 고도화되어 단순 갈취를 넘어 권력(힘)에 의한 노동력의 착취로 연장되었음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이 무한의 탐욕을 그저 탐욕 그 자체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인정 받고자 하는 욕망과 더불어 엔트로피에의 공포가 촉발한 일종의 변태(變態)다.


문득 동화 <꽃들에게 희망을>에 나오는 삽화가 떠오른다. 

상층으로 향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가득한 벌레들의 탑, '무질서도의 탑'이.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적어도 인간 상호간의 식인 행위는 문명의 이름으로 상당부분 사라졌으니까 비교적 아름다워졌다고 말할 수 있으려나. 엔트로피가 없는 세계는 상상할 수도 없이 끔찍하겠지만 그렇다고 엔트로피의 세계가 아름다워 보이는 건 아니다. 전지전능하신 신이라면, 악어에게 잡힌 들소의 고통을 염려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동시에 동물학대를 감내하며 치맥을 즐기는 인간의 위선적 도덕성으로 괴롭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무엇보다 탐욕에 근거한 착취에 의해 인간 다수가 고통받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을.
하여 뱀의 자손인 나는 그 찬송가 앞에서 영화 <우아한 세계>의 송강호처럼 중얼거린다.
"참 아름답다, 아름다워."


....라고 말하려니 너무 장황하다. 하여, 왜 교회를 다니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한마디로 "악어 때문이에요"라고 밖에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니 제발 여호와의 증인 포함, 모든 종교의 봉사자 분들, 저를 전도하려고 하지 마세요. 언제부터인가 저는 어떤 분들의 견해대로 자연 그 자체를 신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나든 들소든 악어든 모두 자연의 일부가 질료로 화하여 이 현상계에 돌출된 것일 뿐이고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한, 개체의 필멸은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천국이요? 당신들의 또다른 탐욕ㅡ영생에의 탐욕을 제게 공유하려들지 마세요. 겨우 6,70년 동안 그럭저럭 착하게 살았다고 영생을 바라는 건 솔직히 도둑놈 심보 아닙니까? (이에 비하면 만 원 투자해서 '겨우' 수십억 원을 기대하는 로또는 차라리 인간적이지 않습니까?) 뱃속에서 머물다가 똥으로 화하여 결국 자연으로 돌아간 그 무수한 동물들을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존재 자체가 '죄'입니다.

죽으면 흙(자연)으로 돌아갑니다. 언젠가 유기물로 화하여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겠지요. 그게 '나(我)'가 없는 영생이고, '나(我)' 없는 환생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뭐, 물론 이런 말하면 옛날에는 이교도로 몰려 화형에 처해졌겠지만요.


무엇보다 초인종 좀 누르지 마세요. 귀찮아 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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