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친구 중에 수줍음을 다소 많이 타고 소심한 영철이(가명)라는 이가 있다. 이 친구의 성격에서 기인한 독특한 화법 중의 하나는 상대방의 제안을 거절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나온다. 예컨대 내가 그에게 전화를 건 상황이라 치자.
나 : 영철이냐?
영철 : 오! 오랜만이다. 이거 반갑구만!
나 : 바쁘냐?
영철 : 글쎄 뭐, 아주 바쁘지는 않은데….
나 : 내가 간만에 시간이 나잖냐. 그래서 너희집에 놀러 가려고 하는데, 어때?"
영철 : 음…
나 : 콜? 오케이. 그럼 30분 뒤에 갈게.
영철 : 음……그럼, 내가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 할게."
이 경우 100% 전화 안 온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짜증이 나는 건 아니다. 그가 원래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라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나 : 여보세요? 불금인데 뭐하냐? 술 생각 안 나?
영철 : 당연히 나지!
나 : 술 한 잔 할까?
영철 : 음……좋지.
'음…' 이 나오면 그걸로 결론은 이미 난 거다. 물론 그가 망설이는 기미를 보인다는 것은 99% 그의 집에 여친이 와 있고, 뜨끈뜨끈한 이불 속에서 사랑의 밀어(蜜語)를 혹은 밀행(蜜行)을 나누고 있음이 틀림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예전부터 그는 이른바 숫기가 없었다. 숫기가 없어 여친 만들기에 어려울 거라고 예상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단적으로 말해 그에게는 '숫기' 따위는 없어도 상관없었다. 왜냐하면 이성을 유혹하는 것은 그의 몫이 아니라 전적으로 상대 여성의 몫이었으므로.
용감한 자가 미인을 얻는다고 했나? 그거 다 구라다. 미팅을 나가면 언제나 '김혜수(를 닮은 예쁜이)'는 그의 차지였다. 용감한 오징어는 소심한 원빈을 이기지 못한다. 여기에 밑줄 쫙~.
용감한 오징어는 소심한 원빈을 이기지 못한다.
일본어에는 '혼네'와 '다테마에'라는 낱말이 있다고 한다. 의미는 대충 다음과 같다.
혼네(ほんね) : 본심에서 우러나온 말. 속마음--->본마음 |
다테마에(たてまえ) : (표면상의) 방침. 원칙 --->겉마음. 가식. 의례적인 태도 |
위의 이원복의 만화가 잘 설명했듯이, 정확하게 따지면, 혼네라는 것은 다테마에 속에 은폐된 속마음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영철이의 태도는 이것을 잘 드러내어준다.
나 : 여보세요? 불금인데 뭐하냐? 술 생각 안 나?
영철 : 당연히 나지!
나 : 술 한 잔 할까?
영철 : 음……좋지. (나 지금 여친과 연애중이니까 나중에 보자....)
다테마에 혼네
'좋다'는 것은 다테마에이고, '싫다'는 것이 혼네다. 흔한 표현으로 '겉과 속이 다르다'는 얘기다. 다테마에는 소위 '접대용 멘트'인 셈이다. 발화된 말과 속내의 의미가 정반대라는 것, 아마도 이것이 일본인의 다테마에와 혼네를 가장 적확하게 의미하는 바다. 그렇다고 이걸 '잘 먹고 잘 살아라!'는 식의, 일종의 반어법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할 것 같다.
어쩌면 위에서 '혼네(ほんね) : 본심에서 우러나온 말. 또는 속마음' 이라고 정의를 내린 것처럼, 이 '혼네'라는 것을 '다테마에 속에 숨은 본심' 이외에 '본심에서 우러나온 말'에도 포함시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상상할 수도 있다. 어떤 순진남이 사귄지 얼마 안된 여자를 집까지 바래다 주는데, 그녀가 집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집에서 라면이나 먹고 갈래요?" 이 경우 발화된 이 말이 바로 '다테마에'이고, 이 말 속에 은폐된 속내가 바로 '혼네'가 될 테다. 그가 혼네를 읽지 못하고 정말로 라면만 먹고 나온 후에 그 여성으로부터 "당신은 순수함과 순결함의 결정체 같은 존재입니다"라는 메시지를 카톡으로 받았다면, 그 말의 혼네는 다음과 같다.
에라, 이 븅딱아.....
위의 영철이와의 대화에서 '당연히 나지!' 또한 혼네에 포함시킬 수 있을 거다. 그러니까 영철이에게 있어 '음…' 이전의 말은 혼네가 되고, '음…' 이후의 말은 다테마에가 된다는 얘기다.
사실, '혼네'를 이런 식으로 광의(廣義)적 의미로도 해석해버리면, 그게 꼭 일본인 고유의 성향이라고만은 말할 수 없게 되므로 그다지 적합한 해석이라고는 할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한국인은 안 그러나? 이런 경험이 있다. K대(군대) 시절, '수지(가명)'가 왠일로 면회를 왔다. 적을 둔 K대에서는 여친이 면회를 올 경우 외출은 물론, 외박까지 허용해 주는 것이 관례였다. 외출을 나간 후 어느 식당에서 밥을 먹는 도중에 불현듯 그녀가 말했다. "나, 돌아가는 버스표 끊어놨어.4시에 발차래." 이 말에 내가 천역덕스럽게 대답했다. "그러지 말고 자고 가." 그녀를 보낸 후, 나는 그녀의 말을 (광의적 의미의) 다테마에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면 기분이 조금은 나아질 테니까.
'자고 가'라는 나의 말은? 물론 다테마에다. 믿거나말거나.
버뜨, 무슨 학술 논문을 쓰는 것도 아니니, 이후의 얘기들에는 광의적 해석을 적용하기로 해 보자. 물론 그저 재미삼아.
대형 마트들 중의 하나인 '코Ⅹ트Ⅹ' 매장 계산대에서 대금을 치른 후 주차장에 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 앞에 줄을 설 때면, 제목을 잘 차려입은 코스트코 직원이 꼭 고객들의 장바구니를 일별(一瞥:한번 흘낏 봄)하고는 영수증에 색연필로 V자 표시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 절차를 거치는 이유는, 에스컬레이터 인근의 벽에 부착되어 있는 안내서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Question :
계산 후 영수증 검사를 다시 하는 이유는?
Answer :
영수증을 재확인하는 이유는 회원께서 구매하신 모든 제품이 정확히 판매되었음을 확인함과 동시에, 제품 가격이 과다 또는 제품 가격이 미만으로 지불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영수증에 표기를 함으로써 영수증의 재사용을 방지합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회원께서 구매하신 모든 제품이 정확히 판매되었음을 확인하기 위해.
2. 제품 가격이 과다, 혹은 미만으로 지불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기 위해.
3. 영수증에 표기를 함으로써 영수증의 재사용을 방지하기 위해.
누구나 눈치챌 수 있는 바이겠지만, 1과2를 다테마에, 3을 혼네라고 한다. 직원이 로보캅이나 터미네이터가 아닌 사람이라면, 그의 일별이 그것을 증명한다.
만일 허언을 배제하고 진심만을 담기 위해 다테마에를 삭제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Question :
계산 후 영수증 검사를 다시 하는 이유는?
Answer :
영수증에 표기를 함으로써 영수증의 재사용을 방지합니다.
고객으로서 아주 기분이 더러워진다…
따라서 그 블로거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렇습니다. 어른들의 세계는 다테마에가 어쩔 수 없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다테마에와 혼네의 혼동에 대해서, 고(故) 유재하는 이렇게 노래를 했다.
"처음 느낀 그대 눈빛은 혼자만의 오해였던가요.
해맑은 미소(다테마에)로 나를 바보로 만들었소."
엘리베이터걸과 유사 직종의 여자들을 제외하면, 여자들의 다테마에는 가끔 지나치게 난해하다. 내가 여성으로부터 경험한, 난해하다고 느낀 최고 레벨의 다테마에는 다음과 같다. 당시의 상황을 조잡한 기억에 의존하여 약간의 썰렁 개그를 삽입해 묘사해보자. 여성의 이름은 편의상 '수지'로 해 둔다. 시점은 IMF가 닥치기 이전의 어느 해다.
나 : 우리 사귀자!
수지 : 미쳤어? 안 돼!
나 : 왜 안 되는데? 너, 내가 싫어?
수지 : 그건 아니야....다만....
나 : 다만 뭐?
수지 : 그냥....하여간 넌 안 돼.
나 : 그러니까 왜 안 되냐고!
수지 : 그걸 꼭 직접 얘기해야 알아듣니? 너하고 나는 성이 같잖아!
나 : 나? 나, 여자 아닌데? 그거 보여줄까?
수지 : 이 저질을 그냥 확! 그 성(姓)이 그 성(性)이니?
나 : 성(姓)이 같으면 왜 안되는데?
수지 : 어휴...넌 동성동본이 뭔지도 모르니?
나 : 동성동본? 뭐, 동성동본끼리는 결혼을 금하는 거? 그거 법이 바뀐 게 언젠데?
수지 : 법이 바뀌면 다인 줄 아니?
나 : 그럼 뭐가 또 바뀌어야 되는데?
수지 : 세상엔 '관습'이라는 게 있어. 너희 집안하고 우리 집안이 그걸 허용할 것 같니?
나 : '집안'이 결혼하냐? 우리가 하는 거지. 글고, 내가 언제 결혼하쟀냐? 그냥 사귀자고 그랬지.
수지 : 그래서 넌 안 되는 거야....
정리해 보자.
우리 사귀자 | 혼네 |
미쳤어? 안돼! | 혼네 |
왜 안되는데? 내가 싫어? | 의문 |
그건 아니야....다만.... | 혼네인지 다테마에인지 애매모호 |
다만 뭐? | 질문 |
그냥...하여간 넌 안돼! | 혼네 |
그러니까 왜 안 되냐고! | 시비성 질문 |
그걸 꼭 직접 얘기해야 알아듣니? 너하고 나는 성이 같잖아! | 혼네를 빙자한 거부 |
나? 나, 여자 아닌데? 그거 보여줄까? | 다테마에 |
이 저질을 그냥 확! 그 성(姓)이 그 성(性)이니? | 짜증 |
성(姓)이 같으면 왜 안되는데? | 알면서도 모르는 척 |
어휴...넌 동성동본이 뭔지도 모르니? | 바보 취급 |
동성동본? 뭐, 동성동본끼리는 결혼을 금하는 거? 그거 법이 바뀐 게 언젠데? | 팩트 강조 |
법이 바뀌면 다인 줄 아니? | 계속 바보 취급 |
그럼 뭐가 또 바뀌어야 되는데? | 진짜 모름 |
세상엔 '관습'이라는 게 있어. 너희 집안하고 우리 집안이 그걸 허용할 것 같니? | (혼네를 빙자한 )다테마에. 혼네는 다음과 같다. '너랑 다른 성이라 할지라도, 사귈 생각 없음.' |
'집안'이 결혼하냐? 우리가 하는 거지. 글고, 내가 언제 결혼하쟀냐? 그냥 사귀자고 그랬지. | 우격다짐. "내가 언제 결혼하쟀냐?"는 다테마에. |
그래서 넌 안 되는 거야.... | 혼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