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의 수술비 5천만 원이 너무나 절실한, 하지만 너무나 가난한 개척교회 목사와 그 아내가 '시험에 드는' 과정을 그린 영화, <기도하는 남자>.
외면상 기독교 영화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외연이 더 넖은 듯하다.
의외로(?) 재미있다. 나름 추천.
주기도문의 "우리를 시험에 들지말게 하옵시며..."라는 구절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왜 예수님은 '우리가 시험에 들더라도 능히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옵시고...'라고 하지 않고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라고 한 것일까?
어쩌면 대개의 인간이란 시험에 드는 순간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 앞에서 도덕적 우월감으로 개탄한 것이 아니라 연민의 시선으로 안타까워했기에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을까. 뭐,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다.
당신은 선한 사람입니까? 누가 이렇게 묻는다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아니오. 저는 존나 나쁜 새낍니다,라고 말하려니 가식적 위악 같아 꺼려진다. 그렇다고 저는 선량한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려니 양심이 뒤통수를 후려갈긴다. 저는 때로는 양이지만 가끔은 개새낍니다. 아마도 이런 중립적 답변으로 얼버무릴테다. 셀프 인성 폄훼의 반대급부로 어쩌면 겸손과 진솔하다는 평가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얄팍한 심리적 전략 이면의 보다 진솔한 속내는 아마 이렇지 않을까. 그래도 범죄자가 들끓는 이 세상에서 이 정도면 뭐...
그래서 기독교식대로 '나는 죄인이다'를 되새김질하지만 기실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크게 괴로워하지 않는 것을 보면, 속내는 언제나 '그래도 비교적 나는 착해'라고 우기는 듯하다.
이 영화가 말하려고 하는 바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듯하다. 종교적 시선으로 보면 '인간은 신의 뜻을 헤아릴 수 없다'가 될까. 하지만 나는 보다 단순하게 본다.
가난으로 절박한 처지가 되었을 때 너는 계속해서 착한 양으로 살 수 있는가?
누가 내게 착하다고 말한다면, 어쩌면 이렇게 대답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아직 궁지에 몰리지는 않았습니다.
이 영화의 한 줄 평 :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개고생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