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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리뷰

먼 훗날 우리

 

한 달 전에 대학 동기와 후배랑(둘 다 여자다) 인근 식당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고 있을 때다. 동기녀가 이런 말을 꺼냈다.
"내 딸은 그래도 엄마의 나쁜 점을 닮지 않아서 다행이야."
내가 물었다.
"너의 나쁜 점이 뭔데?"
그녀가 대답했다.
"의존적인 거."
내가 가볍게 툭 던지듯 말했다.
"여자는 원래 그래."

 

순간, 후배녀의 젓가락이 거세게 테이블 위로 내려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와 동시에 동기녀가 내게 거칠게 말했다.
"너, 그 얘기 취소해."
"왜? 맞는 얘기인데?"
"취소, 아니 사과해."
"싫어"
그러자 그녀가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사과 안 하면 오늘 밥 값 안 낼 거야."
나의 대답은 1초도 지연되지 않았다.
"아, 미안해."
좀 부족한 듯하여 덧붙였다.
"내가 망언을 했어."
이렇게 내 돈을 아끼고, 후배녀는 젓가락을 다시 집어든다.

 

 

변명 아닌 변명을 하건대, 나는 안티-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다만 당시에 읽고 있었던 책이 진화심리학에 관한 것이라 단지 거기에 나오는 내용에 동의를 한 것 뿐이다.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하면, 성-선택의 문제에서 여성은 자식에 대한 '부양투자'를 보장받기 위해 부유하거나 지위가 높은 남성을 선호하도록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되었다는 거다(그리고 자연선택의 입장에서는 오로지 유전자의 전파만이 목적으므로 남성은 다수의 여성을 원하도록 설계되었고, 따라서 다수의 암컷을 거느릴 수 있는 우두머리 수컷으로 거듭나기 위해 고군분투를 할 팔자라는 거다). 내가 '원래 그렇다'고 말한 건 이런 관점에 다름 아니다.

 

뭐, 물론 이런 것이 '자연스럽다'고 해서 그것이 '옳다'는 건 아니다. 윤리철학자들이 흔히 언급하듯 '자연에서 당위가 도출되지는 않는다.' 예컨대 복수의 여자랑 교미하려는 뭇 남성들의 기질이 자연선택에 의해 조장된 것일지라도 '자연스러우니까 양다리는 옳은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일 터. 물론 동기녀와 후배녀가 내게 '남자들은 원래 바람둥이 짐승 같다'고 말하더라도 나는 밥값을 인질로 삼아 그 말을 철회하려 들 생각은 전혀 없지만.

 

작년에 제작된 중국 영화 <먼 훗날 우리>에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예전에 연인관계였던 두 남녀가 우연히 재회를 한 상황이다.

남 : 만약 그때 내게 돈이 많아서 소파가 있는 큰 집에서 살았다면 (우리는 헤어지지 않게 되었을까)?
여 : 그때는 네가 바람을 피웠겠지.
남 : 네가 끝까지 내 곁에서 견뎠다면?
여 : 그때는 네가 성공하지 못했겠지.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여성이라고 한다. 자연선택의 관점에서 본 냉철한 현실인식(?)이다.

영화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경제적 성공에 목이 맨 젊은 남자와, 경제적으로 성공한 남자랑 결혼하려는 데 목이 맨 젊은 여자가 우연히 만난 후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다. 남자는 성공과는 거리가 먼 자신의 현재 모습에 불만이 쌓여가고, 이는 결국 연애 관계를 파장으로 몰아넣는 원인이 된다. 그리하여 오랜 이별의 시간이 찾아오고, 남자는 이후에 게임개발자로 성공을 하게 되고, 다시 그녀와 재회하게 되는데.....

 

주목할 점이 있다. 감독은 이 영화의 여주인공을 소위 '된장녀'로 격하시키지 않는다. 여주가 남주의 곁에 머물며 애정을 쏟았던 순간은 한결같이 남주가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순간들이었다. 오히려 남주가 집을 살 정도로 어느 정도 부유하게 되었을 때는 남주의 속된 모습에 실망하여 다시 한번 이별을 선택한다. 사랑이 자연선택을 극복한 것이랄까. 이 영화를 만든 여성 감독은 자연선택의 진화적 속성을 당연시하는, 다시 말해 '자연에서 당위를 도출하려는' 범속한 처자상을 여주를 통해 거부하려는 것일 게다.

 

나이가 어느 정도 있으신 어느 원생 분께서 내게 흥미로운 제안을 하신다.
"선생님. 제가 괜찮은 여자 분을 한 명 알고 있는데....소개시켜 드릴까요?"
여기서 '괜찮은'이라는 것은 아마도 예쁘다는 의미일 테다. 나는 그 제안을 넙죽 받아먹지 못하고 이렇게 거절 의사를 밝힌다.
"개털이라 연애할 여력도 없습니다...."
이렇게 나는 자연선택ㅡ진화라는 거대한 흐름에 굴복한다. 그리고 사상적(?)으로 나름 된장남이 된다.

 

오지오스본의 음악을 간만에 듣는다.
Goodbye to rom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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