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읽고 있는, 미야모토 테루의 <금수>.
서간체 형식의 이 소설을 읽다 보니 문득 실용적이고 빠르기는 하나 멋대가리(?)라고는 없는 E-메일 대신 자필 편지를 끄적이던 옛날 생각이 난다.
자필 편지의 시대에는 편지지를 고르는 것도 나름 수고로운 일이었다. 당연히 글씨는 공들여서 써야했고, 우체통에 넣은 이후로는 회수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보내기 전 '행인임발우개봉'은 간과할 수 없는 절차이기도 했다. 그러고도 우체통에 넣어버린 이후에 머리털을 쥐어 뜯은 때가 한두 번이었나. 전자 메일의 장점은 무엇보다 <발송 취소> 기능에 있다.
K대(군대) 시절, 이웃한 내무실의 한 동기 녀석은 간혹 내게 연애 편지 대필을 의뢰하기도 했다. 귀찮은 일이지만, 사람 좋은(?) 나는 고작 값싼 떡밥(매점에서 파는 닭발)에도 걸려들고 말았다.
하지만 대필 편지를 쓰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위화감이 없는 문법으로 쓰여진 문장에 추가되는 건 적당한 미사여구 뿐이었으니까. 사실 어떤 작가의 견해대로 미문이란 치기의 산물에 불과한 것임에도 미문 없는 연애 편지는 상상을 할 수 없었던 게 당시 우리들의 수준이었다.
다만 이것만은 고백해야겠다. 대필이 아니라 내 여친에게 보내는 편지였다면, 몇 차례의 퇴고를 거친 후에 오글거리는 미사여구의 수위를 한참 낮추고 차라리 보다 자연스러운 연결의 접미사를 고민했을 거라는.
시심이라고는 쥐뿔도 없을 것만 같은 그 동기 녀석이 만족해 했던 미문 취향의 문장에서 기대한 것은 아마도 자신의 외관과 태도에서 풍기는 투박함을 극복할 어떤 특별함이었을 테다. '알고 보면 이렇게 섬세한 사람이다' 하는.
<금수>의 옮긴이 후기에 이런 말이 쓰여 있다. '이 소설은 환상을 잃어 가고 그 자리에 현실이 들어오는 과정을 담았다. 그것은 독자가 이 소설, 또는 아키와 아리마의 관계에 대한 환상을 잃어 가고 그들의 지리멸렬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아키에게 아리마가 특별한 사람에서 평범한 사람이 되어 가듯.....'
그 동기 녀석은 그 이후로 잘 되었을까? 확언할 수는 없지만 금방 종 치고 말았을 거라는 데에 가진 돈 전부와 내 오른팔을 건다. 미문의 대필 편지 따위는 금방 뽀록(?)이 날 시한부의 '환상'이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