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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메모

수직 서열의 사회















난 위의 진중권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반박할 구석이 전혀 없다.
마지막 것만 언급해 보자.


선배에게 지나치게 깍듯한 게 일면 좋아 보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한 벽이다. 
그렇다고 예의없이 대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나는 예의 없는 인간이라면 그게 친구든 후배든 멀리한다.
내 면전에서 방귀를 뀐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로버트 드 니로, 앤 헤서웨이 주연의 <인턴>이라는 영화를 근래 봤다.
70세 노인인 로버트 드 니로가 주로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회사에 인턴으로 취직한다는 내용이다.
극중 로버트 드 니로가 젊은 직원들과 잘 녹아드는 것은 그의 훌륭한 성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경직된 수직 서열의 문화라는 벽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경직된 수직 서열 문화에서 손해보는 건 젊은이들이 아니다.
그것은 젊은이들로부터의 소외라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
이러니 세대간의 거리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가족간에도 대화가 단절되는 이유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적은 사람을 주눅들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무시와 소외를 습관화하게 만드는 사회,
그게 한국 사회다.


한국인들의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경직된 관계를 강요하는 곳이라면 당연히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수직관계 내에서도 공동체가 잘만 유지되었다고?
그건 경제적 관점에서 봐야하지 않을까? 모든 경제적 활동이 농업에 쏠려있어서 어쩔 수 없이 모여 살아야 했으니까.

한국 사회는 이름이 '이름값'을 못한다.
이름이란 타인에게 불려지라고 만들어진 게다.
그런데 남의 이름을 부르지도 못하고 함부로 묻지도 못한다. 특히 나이가 어린 사람이 연장자인 듯한 사람에게 이름을 묻는 건 실례가 되다 보니, 머릿속에서는 열심히 그 사람을 지칭할 호칭을 찾아내야 한다.
초면인 두 사람이 만났을 경우, 상대방의 나이가 자기보다 높은지 가늠하느라 상대에게 이름을 묻지도 못한다. 그러니 대화가 순탄하게 뚫릴 리가 없다. 서로에게 완벽한 타인이 된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너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구가 생각난다.
그럴 수 없으니 그저 서로에게 '다만 하나의 몸짓'으로만 남는다.


우리 어머니의 이름은 나와 똑같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우리 어머니를 내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이다.
아마도 '길동이 엄마'에서 '엄마'가 생략된 탓이리라.
대한민국의 어머니들은 어느 시점이 되면 자신의 이름이 상실되는 거다.
남자도 마찬가지이기는 하다. 내 이름은 '사장'이다.
이름값을 못하는 사회는 상대방을 호칭할 명사를 열심히 궁리하게 된다.
그래서 찾아낸 호칭이란 게,
이모, 사장님, 사모님 따위들이다.
어떤 이는 그래서 나더러 '사장님'이라고 부른다.
하긴 사장은 사장이다. 돈 한 푼 안 되는 기타 음악을 만드는 사장. 시장만능주의의 견해로는 그렇다는 얘기다.


나이가 계급이 되는 곳,
헐~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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