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후배 청룽 군이랑 술 마시며 이런 대화를 하곤 한다. "죽을 때까지 일만 권의 책을 읽는 게 가능할까? 만화책과 동화책은 물론, 썬데이서울이나 플레이보이 같은 잡지책 등은 빼고."
이에 대해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이렇게 말한다. "하루에 한 권의 책을 완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루에 한 권을 완독한다고 쳐도 일만 권을 읽으려면 대략 삼십 년이 걸리는 일인데, 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재밌는 건 이렇게 말하는 이동진 씨도 사실은 상당한 수집벽이 있어서 이만 권 가까이 책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예전에 오직 단 한 장의 챕터만 읽기 위해 무려 이만 원 가까운 가격의 책을 구입한 적도 있다(<손>이라는 제목의, 뇌신경학 분야의 저서인데 '연주가의 손'이라는 소제목이 달려있는 두 번째 챕터만 읽었다). 마치 오직 단 한 곡 <크립>을 듣기 위해 라디오헤드의 데뷔음반을 통째로(?) 구매한 것처럼.
사실 이런 식이라면 평생 만 권의 책을 읽는 게 가능해지기는 한다. 하지만 우리가 일만 권의 책을 평생 읽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보통 완독을 기준으로 놓고 던지는 것이다.
물론 속독이라면 가능하다. 4층짜리 빌딩(이라기보다는 협소주택) 안에 가득히 책을 쌓아놓은, 일본의 대표적인 장서가인 다치바나 다카시가 '인생은 짧고 읽을 책은 너무나 많다'는 이유로 속독을 권장하는 반면에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는 디테일한 독서를 위해 느리게 읽기를 권한다. 다치바나만큼 머리가 비상하지 못해 당연히 속독이 불가능한 나로서는 '평생 일만 권'의 달성은 요원하기만 하다. 그저 수집하는 거면 몰라도.
장석주 시인은 삼만 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고, 일본의 어느 장서가는 무려 십칠만 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다는데, 실상 다 보지도 못할 책을 이렇게까지 모으는 것은 이동진 씨의 말마따나 지식에의 갈증 이전에 물욕의 한 측면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그는 말한다. "제가 이걸 죽는 날까지 반이나 읽겠어요?" 그의 말마따나 확실히 수집벽은 여자보다는 남자에게 편중된 현상임에는 분명하다. 초딩 시절, 새 우표가 공개되는 날의 새벽에 문도 열지 않은 우체국 앞에 개떼 같이 몰려갔던 급우 무리들 중,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을 게 분명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역사상의 수집광들 중에 백제의 의자왕이 있다. 그는 삼천 궁녀를 '모았다.')
수집벽 중에 병적으로 심각한 것은 아마도 '애니멀호더'일 것이다. 개나 고양이를 수십, 수백 마리씩 데리고 있는 행태는 '동물 사랑'이 아니라, 개인의 포용 가능한 한계 개체수를 망각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정신병으로 파악되는 듯하다.
수집벽의 일면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대상들 중에는 악기와 음반 따위가 있다. 집안에 수백 대의 기타가 있는 잉베이 맘스틴이나 스티브 바이 같은 소위 일류 연주자는 차치하더라도, 간혹 기타 수집가 분들을 직/간접적으로 접할 기회가 생기기도 한다. 예전에 마틴기타를 들고 길을 가는 도중에 어떤 이가 나를 불러 세우더니 잠깐 기타를 볼 수 있겠냐고 묻는 거다. 한참 얘기를 나누어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통기타 수집가였다. 마틴 기타에 대해 이것저것 열변을 토하는 그를 보면서 '그래. 기타 좀 못 치는 게 무슨 상관인가, 그것에 대한 지대한 관심만으로 인생의 권태를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 또한 종요로운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어쩌면 했을는지도 모른다. 그가 내 기타를 호평해 주어 내 기분이 좋았다면.
잘 알려져있다시피 가수 전영록 씨는 이만 장의 LP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아트롹 전문가인 성시완 씨도 아마 대동소이할 것으로 추측된다.
롹음악 매니아였던 고딩시절, 어렵게 푼돈을 모아 대략 이백오십 개 분량의 카세트테잎을 모은 적이 있다("겨우 이백오십 개?"라고 말할 이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당시 졸라 개털이었던 고딩이었음을 감안하면 이마저도 대단한 숫자다). 어느날인가 집 수리를 위해 고용한 일꾼들 중 한 명이 그것들을 싹쓸이해 가고, 또 대딩 때 모은 LP와 CD, 그리고 만화책들 역시 대여의 형식으로 거개가 사라져 버린 이후에는 수집의 허망함 때문이었는지, 혹은 최소한 음반과 책에 한하여 공산화가 이루어진 상황에 대해 개탄해서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음반에 대해서는 수집을 위한 수집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았다.
어찌 생각해 보면, 당시의 그 절도범에게 감사해야 할 일일는지도 모른다. 장서의 괴로움을 겪고 있는 이들 중 혹자는 언젠가 자신의 서재에 불이 나서 잿더미가 된 자신의 책들을 바라보는 걸 때로는 희망하면서도 여전히 병적인 수집벽이 현재진행중인 것을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