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좌충우돌 잡글쓰기

시각이 갑

원주 도인 음해선생께서 VR이라는 것을 구매하셨다.

내게 그것을 경험해보는 은총을 베푸셔서 나는 고글처럼 생긴 그것을 착용하였는데…내 시야에 가득히 들어온 것은 천길만길 낭떠러지에 설치된 롤러코스터였던 것이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문득 영화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모피어스의 대사를 읇조렸다. This is not real…

가상현실 속 롤러코스터가 시동을 걸기 시작하고, 이윽고 철길 끝 낭떠러지 끝에 머물게 되었는데…솔까 엄청 무서웠다는 걸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식은 땀에 약간의 메스꺼움까지.

 

머리로는 이게 현실이 아니라는 걸 안다. 하지만 감정적으로는 엄청난 공포감에 사로잡힌다.

 

아는 척을 하자면, 오래전에 흄이라는 이름의 철학자가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이성은 정념의 노예다. 세련이나 품위와는 거리가 먼 나는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객관적 현실 인식은 시각적 구라 정보 앞에서 조차 좆밥이다.

 

인간은…아니, 개든 고양이이든 적어도 고등생물체에게는 시각 정보를 뇌 속에 저장하여 그것을 상상으로 재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예컨대 사과라는 대상을 경험한 바 있다면, 이후에 그것을 직접 눈으로 보지 않더라도 머릿속에서 그것의 이미지를 그려낼 수 있다(이를 전문용어로 표상이라고 한다나 뭐라나).

그런데 인간은 경험해보지 않은 정보조차 상상력으로 재현ㅡ표상할 수 있는 능력조차 있는 듯하다. 예컨대 A라는 인간은 동성간의 성애를 경험한 적이 없다. 그렇더라도 그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꼬추와 똥꼬의 결합을 표상할 수 있고 그에 따르는 감정적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

이에 대해 어떤 진보적 학자는 이렇게 썰하였다. 너는 그런(부정적) 반응들을 도덕적 확신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자면, 정서적 반응과 도덕적 입장을 구분해야 한다는 얘기다.

 

나는 이 학자의 말에 동의한다. 아울러 기독교계가, 만만한 게 홍어좆이라고 틈만 나면 성소수자를 정죄하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것에 대해, 성경에 뭐라 써 있든지간에 반대한다. 더불어 그런 정서적 반응에 대해 도덕적 확신이라고 오인하는 점에 대해 아주 이해를 못할 바도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동성애 금지에 관한 성경말씀에 기대고 있는 듯 하지만, 사실상 표상으로 재현된 그 이미지(19금)에 대한 시각적, 그리고 그에 따라 수반되는 감정적 거부감이 선행되는 것은 아닐까.

 

https://youtu.be/hNAbQYU0wpg

 

뭐, 솔까 꼭 동성애적 성애가 아니더라도 인간의 섹스는 지극히 도착적이라 '내'가 하는 섹스는 그럭저럭 사랑의 행위라는 관념적 차원으로 덮어버릴 수 있지만 남이 하는 그것에 대해서는 관음적 도착이 작용하는 것인지 오로지 육체적인 질펀함으로서 더 야하고 더럽게(?) 느껴지는 거다. 아마도 제한적인 주관적 시각과 보다 포괄적인 객관적 시간의 갭에서 기인되는 듯하다. 배우자나 연인의 외도에 대한 분노의 과도함, 그리고 야동이 근절되지 않은 근거다. 에리히 프롬의 견해대로, '내 똥은 타인의 똥보다 덜 더러워 보인다.' 그래서 '내가 하면 에로티즘, 남이 하면 포르노'라는 썰이 떠도는 건 아닌지.

 

어쨌거나 매트릭스의 네오는 구라인 가상세계를 극복했다. 나는 아직 못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시각의 망상ㅡ시각이라는 우선적인 감각기관이 유발하는 생각ㅡ판단ㅡ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내가 '꼬추와 똥꼬의 결합이 뭐 어때서?'라고 주장하는 것은, 흄의 말대로 감정을 이기지 못하는 이성임에도 꾸역꾸역 이성의 탑을 세우려는, 그렇게 함으로써 뭔가 '있어 보이려는' 부질없는 시도는 아닐까? 마신 물이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는 것을 시각으로 확인해도 아무렇지 않은 경지가 요청되어야 이성ㅡ감정 간 갭이 해소되는 것은 아닐까?

이상 개똥철학.

'좌충우돌 잡글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설 쓰기의 어려움  (0) 2024.12.17
세상의 이치  (0) 2021.09.25
총총거리던 총기의 증발  (0) 2020.05.06
정념의 노예  (0) 2020.05.06
우리를 형성한 법칙  (0) 2020.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