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뇌경색 후유증으로 기타도 못치고, 할 일은 없고 시간은 남아돌았던 시절에 나는 한가지 결심을 한다. 에드거 앨런 포우와 스티븐 킹 저리가라는 공포소설을 쓰기로 한 거다!
소설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주인공과 그 친구들은 고심 끝에 시체를 유기하는 데 성공하지만, 어느날인가 주인공이 인근 야산의 자작나무 숲을 산책할 때 자작나무 사이로 무언가가 보일듯 말듯 배회하고 있음을 감지한다. 날이 갈수록 그것(?)은 점차 형체를 드러내는데.....
여기까지 쓰느라 도합 128페이지를 허비했다. '그녀'를 만나게 되는 과정과 우발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 일, 그리고 사체 유기의 과정이 다소 길었기 때문이다.
그 뒤에 어떻게 되었냐고? 글쎄다. 나도 모르겠다. 알면 계속 썼지 그만 두었겠나.
결말도 생각해 두지 않고 소설을 쓰면 어떡하냐고? 맞는 얘기다. 다수의 소설 작법책은 중간에 약간의 변화는 있을지언정 애초에 작가가 사건의 경과와 결말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럼에도 나는 왜 그랬을까? 아마도 쓰다보면 알아서 플롯이 진행되어 가겠지,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시작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실제로 스티븐 킹은 그렇게 쓴다고 한다. 최초의 상상력이라는 맹아를 가지고 일단 쓰기 시작하면 마치 이야기 자체에 창작력이 내재해 있는 듯 그냥 써진다는 거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스티븐 킹이 아니다.
사실 소설의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것은 노력만 하면 어느정도 가능할 것 같기는 하다. 문제는 결말이다. 일을 벌이는 건 쉽지만 수습하는 건 어렵다는 얘기다. 작중 주인공은 어떤 딜레마에 봉착한다. 그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것처럼 난감한 문제도 없다. 한참 이 문제에 고심하고 있었을 때 우연히 보게 된,1979년 작 한국 영화를 통해 나름의 해법을 발견했다.
영화 <가을비 우산 속에>다.
이 영화의 내용은 이렇다(영상은 댓글창에). 주인공 동원(신성일 분)은 무명 화가이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깊은 산속의 산장을 찾지만, 계속되는 영감의 부재에 고심하다가 자살하기로 결심한다. 목 매달아 밥숟갈을 놓으려는 순간 어김없이 등장하는, 산장 주인의 딸인 선희(정윤희 분). 아마도 이런 대사가 있었겠지.
"(여리여리한 목소리로) 선생님, 이러시면 안 돼요!"
"(굵직한 목소리로) 이거 놔, 놓으라구!"
이후의 전개는 상상하는 그대로다.
그러다가 동원은 선희 엄마의 방해공작으로 인해(세대를 불문하고, 예술가 사위를 바라는 부모는 없을 거다) 산장을 떠나게 된다. 이후 그리움의 세월을 보내는 선희. 그러던 어느날, 선희는 그를 찾아 산장을 떠나 서울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무수한 가을비 우산 속 얼굴들 속에서 그의 얼굴은 없다.
세월이 한참 흐르고, 미술을 포기한 동원은 포크레인 기사로 지내다가 정은(김자옥 분)이라는 참한 여인과 결혼을 하여 안정되고 평온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날, 동원은 옛 생각에 이끌리기라도 한듯 그 산장을 다시 찾는다. 산장 입구에서 그는 8세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를 발견하다. 누구냐고? 빤하지 뭐.
선희와 오랜만에 재회하게 된 동원. 모든 내막을 알게되고 충격에 빠지는 것도 잠시, 그는 선희, 그리고 아들 승희와 함께 좋은 시간을 갖는다.
하지만 세월이 조금 더 지난 후에 부인인 정은이 이 사실을 알게 되고, 정은은 선희가 있는 산장으로 찾아가 선희의 얼굴에 찬물을 확 끼얹어버리고 김치싸다구를 날린 후 머리끄덩이를 잡고 죽어라 싸우는......게 아니라, 착한 심성의 소유자답게 조용하고도 정중하게 자신의 남편과 헤어져 줄 것을 부탁한다. 그리고 동원에게는 다시 미술을 시작하도록 종용한다. 이후 작품전에서 수상을 한 동원. 그러나 그는 술퍼맨의 나날을 보낸다. 그의 고뇌의 중심에는 당연히 딜레마가 있다.
참하고 지고지순한, 현모양처 정은을 버릴 것인가,
아들까지 낳은, 생명의 은인인 얼짱녀 선희를 버릴 것인가.
잠시 뜬금포.
옛날 한국 영화들을 모아놓은 유튜브 채널 <한국 고전 영화>를 통해 가끔 70년대 한국영화를 감상하곤 한다. 다음의 쏠쏠한 재미가 있다.
1. 영화를 보면서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가 있다.
2. 급작스러운 클로우즈 샷과 같은 아주 올드한 촬영기법을 감상할 수 있다.
3. 오글거리는 대사를 듣는 맛이 있다.
예) "두수야...저기 떠오르는 태양을 봐. 우리에겐 저 태양처럼 빛나는 미래가 있어."
4. 남주와 여주의 목소리와 어투가 한결 같은 재미가 있다.
예) 남주 : (굵직한 목소리로)"영희! 내가 널 사랑하기에 떠나려 한다는 걸 진정 모르겠어?"
여주 : (여리여리한 목소리로)"흑...선생님 미워요~~"
5. 가끔 명 발연기도 감상할 수 있다.
6. 스토리상 도무지 해법이 없을 경우 과감히 주인공을 죽임으로써 단번에 해결하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7. 2:8가르마의 중년 남자와 젊은 처자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그림으로써 현시대 아재들의 환상을 충족시켜줄 수 있다.
8. 코미디물이라도 후반에는 비극적 감동 요소가 꼭 삽입됨으로써 신파의 정석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9. 추억을 자극하는 음악과 음향.
10. 가끔 '나 잡아봐라'의 현장을 목도할 수 있다.

다시 <가을비 우산 속에> 얘기로 돌아가자.
이 영화의 결말에 대한 작가의 고뇌가 뼈저리게 느껴진다. 기실 그렇지 않은가? 윤리적 딜레마의 문제보다 심각한 실존적 문제는 없다. 신경숙 작가가 표절했다고 알려져 있는 기시마 유키오의 <우국>도 유사한 딜레마를 보여준다. 친구들과의 신의를 저버릴 것인가, 아니면 국가에 대한 충성을 저버릴 것인가. 우정인가 충성인가?
셰익스피어는 <햄릿>을 통해 고전적 딜레마의 문제를 다루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가을비 우산 속에>의 작가는 고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햄릿의 딜레마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다가 "유레카!"하고 외쳤을 것임에 틀림없다.
윤리적 딜레마로 고뇌에 빠진 나머지 술퍼맨이 된 신성일. 오늘도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며 고뇌한다. 선희냐, 정은이냐.
여기서 신성일이 자신의 전공에 걸맞게 미학적 측면을 고려하였더라면, 기실 이런 것은 딜레마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당근 선희지). 하지만 그러기에 신성일은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작가는 작중 해법을 <햄릿>을 통해 배운다. 양다리의 자책감에 만취 상태로 휘청거리며 길을 가던 동원을 차에 치여 죽게 만든 거다.
이렇게 모든 문제는 일시에 해소된다.
나는 왜 소설을 끝까지 쓸 수 없었던가? 그야 일을 벌여도 수습을 못하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하였던가? 살인이라는 죄책감을 못이겨 자작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살하는 결말로 끝내었으면 되었을 것을! 그리고 결말에 '그를 자작나무 숲으로 이끌었던 것은 자작나무 숲을 소리없이 배회하던 그 유령이었을까? 아니, 어쩌면 양심이라는 인간성의 한 말단이 환각으로 재현되어 그를 죽음의 충동으로 이끌었던 것은 아니었을까?'하고 폼나게 끝냈으면 되었을 것을. 그리하여 그 해에 '에드거앨런포우 상'을 수상하면 좋았을 것을. 그리하여 수상 소감을 전광석화 페인터 밥 로스 쌤처럼 했으면 간지났을 텐데.
소설 쓰기라는 것은....별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해 보세요, 참 쉬워요
'데우스 엑스 마키나(기계 장치로서의 신)'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말은 심형래의 <디워>라는 영화에 대해 '100분 토론'을 할 당시에 패널인 진중권 교수 덕에 유명해졌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렇다. 작중 주인공이 엄청난 시련과 고난에 빠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인공의 힘으로는 이 상황을 타개할 수가 없다. 그 순간 '뿅'하고 신이 나타난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경고하는 바는 이것일 테다. 장난하냐? 그렇게 쓰면 안 돼.
공의의 신이 죽은 세상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역할은 죽음의 신이 관장하게 된 걸까? 딜레마에서 도무지 빠져나올 길이 없으면 그냥,
죽여라
아, 이제 소설을 쓸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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