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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리뷰

와이키키브라더스




1.

올해 봄, 경기도 일산의 집에서 강원도 W시로 이사를 가기 위해 짐을 정리하던 도중에, 수북한 오선지--정확하게는 실패한 창작의 흔적들로 더럽혀진 오선의 페지들 더미 속에서 한 장의 종이를 발견하였다. 대학노트에서 뜯어낸 그 종이에는 개발새발의 글씨가 적혀있었는데, 나의 필적임에는 분명하였음에도 워낙 급하게 써내려간 글씨였기 때문에 한 눈에 무슨 내용인지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실눈을 뜬 채로 겨우 문맥을 짚어가니 그제서야 무슨 내용인지 파악이 되었다. 그것은…8~9년 전 즈음에, 무명 악사의 전락을 다룬 임순례 같독의 감독의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본 후 참담한 마음에 몇 개피의 담배를 태우며 옮겨 적은 영화 대사들이었다. 그 내용을 알아볼 수 있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지미 헨드릭스의 음악은) 언제 들어도 예술이구만…이 친구하고 나하고는 42년생 동갑이거든. 근데 이 친구는 28세에 요절했는데 나는 이 나이 되도록 잘 먹고 잘 산다는 게 한심하지 않아? 나 28살 때 뭐했는지 알아? 남편 월남 보내놓고 바람난 아줌마랑 캬바레에서…에이, 관두자."

 

 "뭘 결혼씩이나 하냐. 그냥 좋다가 마는 거지. 그래도 그때(스쿨 밴드 생활하던 때)가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였다."

 

"야, 그 여자 너 가져라. 난 아무것도 필요없다. 여자도 필요없고 돈도 필요없고 이젠 음악도 지겹다."

 

"올갠 좀 가르쳐 주세요."

"이건 날 샌 직업이야. 그러지 말고 다른 거 배워. 포크레인이나 자동차 정비나…그런 거 좋잖아?"

 

"나 이제 짤렸으니 뭐 먹고 사냐.(...) 성우야, 행복하니? 우리들 중에 지 하고 싶은 일 하며 사는 거 너밖에 없잖아. 그렇게 좋아하는 음악 하고 사니까 행복하냐구?"

 

이 글을 다시금 읽게 되었을 때 문득 모 기타사이트에 이 영화의 리뷰를 기고했던 것이 생각이 났다. 내 개인 블로그에 담기 위해 해당 글을 찾으려고 노트북의 하드를 뒤졌으나 발견할 수 없었다. 해당 사이트에서 찾으려 했으나 당시의 아이디는 물론 비밀번호까지 다 잊어버렸던 탓에 접속을 할 수도 없았다.

그러던 차에 오늘, ‘안드레스세고비아’님께서 해당 글에 대한 말씀을 꺼내시는 것이 아닌가. 아직까지 그 졸고를 기억하고 계시는 분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그리고 동시에 글을 신중하게 써야겠다는 각오도 다지게 되었다). 결국 이분의 도움으로 해당 글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내게 메일로 전문을 보내주신 거다!

이 지면(?)을 빌어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감사합니다^^).

아래의 글은 당시의 그 글에서 약간의 첨삭과 수정을 한 것이다. 부끄럽지만, 이 지면(?)을 빌어 다시 한번 더 공개한다.

 

이 글을 다시 읽어보니 문득 8~9년 전의 새벽이 떠오른다. 잠 못 이루던 늦은 밤에 우연히 보게 된 그 영화의 감회에 약간의 개인적 기억이 오버랩되면서 참담한 마음에 몇 개피의 담배를 태웠던 그 새벽이.

 





2.
제가 아는 이 중에 클래식기타 전공을 목표로 하는 고등학생이 있습니다. 가끔 학원에서 바흐와 망고레와 폰세의 곡을 연습하곤 합니다.
어느 날인가 같이 밥을 먹는데 이 친구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지금 기타(를 직업으로)하시는 분들은 왜 기타를 쳤죠?"

너무나 광범위한 답을 요구하는, 막연한 질문이길래 많은 답변들 중 가장 성의 없어보이는 대답을 했습니다. 현문에 우답인 셈이죠.

 "좋아했으니까"

그런데 그 친구는 너무나 상투적인 이 답변이 다소 불만족스러웠나 봅니다.그래서 입 안에 있는 밥을 다 삼킨 다음에 질문에 대한 답을 넘어서는 것까지 적나라하게 얘기해 주었죠.

 

"중딩,고딩,대딩이 시절엔 말야... 집이 너무나 가난해서 '거지 똥꼬의 콩나물을 빼 먹는' 지경이 되지 않는 한, 아직 생존에 대한 절박감을 느낄 수가 없거든. 그러니까 그 시절엔 오로지 자기가 순수하게 좋아하는 것을 추구할 수 있어. 근데...자신의 생계를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나이가 되면...이게 돈벌이를 위한 수단이 되고 그러면서도 생계의 압박에 시달리는데...(중략)....그러다보면 학생 시절에는, 적어도 마인드 하나만큼은 '연주가의 손’이라고 자부했던 것이, 지금은 그냥 '학원용 손’으로 정체되어버리게 되거든. 어릴 때부터 한 거라고는 이거 밖에 없으니 다른 거 하기도 그렇고...그냥 완전히 타성에 젖어버리는 거지. 가끔 술자리에서 '옛날엔 정말 잘 쳤는데…’하는 따위의 타령이나 하면서."


저는 진짜 잔인한 입니다.
그 학생이 가고 나서 이런 말을 한 걸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그 학생에게라기보다는, 제 자신에게 잔인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 김연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청춘이란 시간이 굉장히 많이 남아있는 시절이었어요. 제가 생각해 보니까 그 스무 살 때는 뭐 죽는다는 거에 대한 가능성을 조금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고 그다음에 이 세계가 바뀔 거라는 것에 대해서도 조금도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어요. 단 한 순간도.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사는 그 세계는 영원히 계속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계속 대학생으로 살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부모님들이나 어른들이 봤을 때는 되게 철이 없는 태도인데요. 그래서 그리운 거죠. 그 철 없었던 시절에 대해서. 왜냐하면, 시간이 뭐 계속 남아 무한대로 남아 있는 상태이니까 웬만한 일들은 다 내일 하면 돼요. 그래서 당장 해야 될 일들은 뭐 그렇게 많진 않더라고요. 그래서 할 수 있는 게 책을 보는 걸 좋아했으니까 책을 읽었고요.

그다음에 책을 읽고 나서도 하루가 길어서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글을 썼어요. 다른 뭐 토플을 공부한다든가 아니면 뭐 자격증을 하나 딴다든가. 이런 걸 하면 좋았겠는데 시간이 워낙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건 나중에 해도 됐거든요. 그래서 그때는 하고 싶은 걸 그냥 계속 했단 말이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 시간이 많지는 않다는 생각이, 많이 남지는 않았단 생각을 하기 시작을 했어요. 그러면서부터 내일로 미룰 수 있는 일들이 이제 점점 없어지게 되는 거죠. 그래서 예전 같았으면 젊었을 때 같았으면 안 했을 일들을 지금은 막 그걸 먼저 해야 되고. 젊었을 때 시간 많을 때 할 만한 일들은 점점 뒤로 미루게 되고 있어요. 그게 청춘이 끝난 자들의 삶이죠. 힘든 삶이죠. 


예전에..그러니까 20대 후반의 나이에...돈벌이를 위해 레스토랑에서 기타 연주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레스토랑에서는 아무래도 주류도 팔다 보니까 아주 가끔 술 취해서 혀가 꼬인 취객 분들의 요구를 받아줘야 할 때도 있습니다.

"어이~그딴 거(?) 말고~ 거 있잖아, 쿵 작작 쿵 작, 이런 거. 한번 쳐봐. 내가 한 곡조 뽑아보게."

저는 그만 발끈한 나머지,

 

“어디서술쳐먹고와서는개X랄이야,이꼰대새X가.존(슨)만한새X가개념을상실했나,내가룸싸롱오부리로보이냐?나이는똥구멍으로쳐드셨나,어디와서주사질이야,주사질이.여기서술좀작작처마시고룸싸롱이나가서 아가씨들엉덩이나주무르며실컷노래를하시든가.미친꼰대X꺄!"

 

 라고 대답했다면, 예의는 다소 없어 보일지언정 얼마나 속이 시원했을까요. 비록 무명의 악사이더라도 자존심 하나는 당당하게 지키는 것이 폼도 나고 보기에도 좋잖아요. 하지만 현실은 ‘폼생폼사'보다는 무사안일을 원합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 네……^^;;"

답례로 2만원을 팁으로 받았습니다. 참으로 눈물나게 고마운 아저씨였습니다.

 


 


이 시절보다 훨씬 더 어렸던 시절, 그러니까 군대 가기 직전에 휴학을 했을 당시는 진로에 대해 걱정이 많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전공이 아주 싫었거든요. 화학 말입니다.
생물학과에 적을 두신, 어느 동아리 선배님이 어느 날 내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XX아, 너 화학과지? 이리 좀 와봐. 내일 시험인데 이거 도통 모르겠다.”

“네?"

"이 문제 말야...이 원소가 저 원소랑 공유결합을 하는데...."

“아…저, 그런데 공유결합이 뭐여요?”

 

  그러자 이 선배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뭐? 화학과 다니는 ‘쌕끼'가(그냥 이 분의 친근한 말투입니다) 공유 결합도 몰라? 생물학과 다니는 나도 아는데...일루 와봐, 쌕꺄..."

 

결국 그 선배한테 공유 결합에 대해 강의를 30분 가량 들어야만 했습니다.

같은 학과 친구이자 같은 동아리 친구인 S는 이를 두고 '치욕'이라고 하더군요.

여하튼, 그 정도로 싫었습니다.

수학을 안 할 줄 알고(고딩 시절에 수학을 열나 못했습니다) 화학과를 선택한 건데, 알고 보니 '물리화학'이라는 빌어먹을 전공필수 과목도 있었던 겁니다. 한번은 인테그랄(∫)이 세 개나 들러붙은 적분식을 본 적도 있습니다. 하나만 붙어도 풀을까 말까 하는 수준인데 말입니다. 그 식을 생각하면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립니다.

 

 그래서 심각하게 자퇴를 고려했습니다. 자퇴가 아까울만큼의 명문대도 아니었고요.

'하지만 자퇴하면 뭐하지?'하는 압박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고민고민을 하다가…그래, 돈을 모아서 스페인이나 독일로 유학 가자. 그게 유일한 출구(?)다. 일단 돈부터 벌자. 가능하면 짧은 시기에 많이. 뭐, 이런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곰이 재주라고는 구르는 것 이외에는 없다보니 어떻게 하면 기타로 돈을 벌까…고심하다가 결국 절친한 선배님과 상담을 했습니다.

 

 "학교 그만 둔다고?"

"네..."

"그만 두면 뭐하게?"

“돈 좀 벌려구요..."

"뭐해서? 알바하려고?"

"아니요...그래서 말인데요....저도 형이 하시는 일을 좀 해 보면 어떨까..."

“이 일? 새꺄, 이 일도 돈 없으면 못 해. 이펙터 사야지, 프리앰프 사야지, 거시기 사야지, 뭐시기도 사야지....그리고 기타도 '소리나' 같은 거 들고 오면 받아주지도 않아. 적어도 펜더는 되야지. 그래야 '룸'에 넣어줘."

"아...네.."

"그리고....이 일은 사람이 할 일이 못돼. 하지 마."

 

레스토랑에서 술 취한 아저씨의 ‘오부리'나 해야만 했던 그 날, 그 선배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진짜 할일이 못되는구나.

비교적 이른 나이에 삶의 이면을 깨달았.................기는 뭘 깨달았겠습니까. 어디서 동네 양아치에게 몇대 얻어 맞은 거 가지고 참전 용사 앞에서 삶과 세계의 폭력성에 대해 운운하며 ‘오바'하고 호들갑 떤 꼴이죠.

 

 

 

‘엑소’나 ‘AOA’같은 그룹을 아는 신세대 분들이라면 생소한 이름이겠지만, 한 때 저들만큼이나 잘 나갔던 그룹인 ‘H.O.T'의 멤버였던 문희준은 아마도 넷상에서의 다구리 폭력을 많이 경험한 연애인들 중 한 명일 겁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 유명한 '문희준 어록’ 중 다음과 같은 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롹커는 배고픈 직업이예요. 저도 하루에 오이 세 개만 먹고 산 적이 있어요.”

 

문희준의 이 얘기에 한국 롹커들의 현실에 대해 뼈저리게 공감하고 있는 소위 롹애호가 분들은 격분하였습니다. 가난한 언더그라운드 롹커의 정 반대쪽, 그러니까 ‘오버그라운드’의 제일 잘 나가고 있는 댄스 그룹에 발을 담그고 있는 이가 할 얘기는 아니라는 거죠..

 

작금에 생각을 해 보면, 문희준이 뭐 그 당시, 그러니까 '잘 나가는' H.O.T 멤버였을 때 오이 세 개만 먹고 산다는 말을 한 것도 아니고, 현재 아이돌 댄스 그룹에 적을 두고 있다고 해서 과거에 롹음악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추측도 근거가 없습니다(서태지를 보세요). 그러니 당시 네티즌들의 ‘다구리’는 좀 지나쳤던 게 사실입니다.

(여기서 고백해야겠습니다. 저 역시 문희준의 저 말에 격분한 나머지 만일 그가 눈 앞에 있었다면 두 손을 모아 곶추 세운 다음, 분노의 똥침을 그의 ‘학문'에 날렸을지도 모릅니다. ‘학문’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문득 이런 썰렁한 우스갯말이 떠오릅니다. 문제:도서관과 화장실을 공통점은? 정답:두 곳 다 학문(항문)을 닦는 곳).

어쨌거나 이 발언의 진위 여부에 상관없이(후에 사실무근이라고 밝혀졌습니다) 문희준은 계속 배고픈 롹커들에게 오이로 두들겨 맞아야 했습니다.

 

무명의 롹커들의 삶.

찰딱서니 없는 사춘기 소년,소녀들이 봤을 땐 멋지게 보이겠죠. 아무렇게나 뱉어대는 침, 힘없이 꼬나물어서 아래로 축 처진 담배, 낡거나 찣어진 청바지, 번들거리는 장발(이건 좀 아닌가…ㅡㅡ;;,). 그리고 반항하듯 타오르는 눈빛--현실이 아닌 어딘가 저 먼곳을 바라보는 듯한….
이렇게 묘사하고 나니 대번에 떠오르는 가상 인물이 있습니다. <응답하라 1988>세대 중 소위 ‘순정만화’ 애호가 분들이라면 김혜린이라는 작가의 <겨울새 깃털 하나>라는 한 권짜리 단편만화를 기억하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거기에 ‘지한’이라는, 젊은 천재 시인이 나오는데, 그 외관이 위에서 묘사한 그대로입니다(아무렇게나 침을 뱉는 것은 제외하고). 이 친구는 한 술 더 떠서 각혈까지 합니다. 소위 ‘아웃사이더’의 전형인 셈이죠
.

 



‘아웃사이더’하니까 외래어가 유발하는 사대주의적 어감 때문에 뭔가 ‘있어’ 보이지만, 그 뜻은 다들 알다시피 열외자, 국외자 따위입니다. 하지만 이런 관점을 벗어난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 이가 있습니다. 영국 작가 콜린 윌슨은 소위 주류인 ‘인사이더’의 관점에서 바라본 ‘아웃사이더’의 본모(本貌)를 전복합니다. 그는 안일을 추구하여 오로지 돈벌이만을 탐하며 하루하루를 타성으로 채울 뿐인 현대인들의 극단에 아웃사이더를 정립합니다(아는 척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우리들 대개는 ‘열외자’를 그런 관점으로 보지는 않죠. 그것은 그저 사회부적응자, 달리 말하자면 ‘잉여인간’일 뿐입니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어느 아웃사이더 읿본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인간실격’으로 보는 것이죠.
제가 목격(?)한 무명 롹커들의 삶의 풍경은 대체로 이랬습니다.

거주지는 주로 집세가 싼 반지하나 옥탑방.
그 방 구석엔 몇달 째 치우지 않은 소주병과 패트병.
담배꽁초가 수북하게 쌓여서 넘치기 직전인 재떨이. 
항상 방바닥에 깔려있는 이불. 
겨울이면 보일러 기름값이 아까워서 조그만 전기 난로로 겨울을 납니다.
그들에게 싱크대나 가스 레인지는 부르즈와적 취향일 뿐입니다.
휴대용 가스버너와 양은 냄비로 주방 기구들을 대신합니다.
무스나 헤어 스프레이는 필요없습니다. 언제나 자연산 기름(?!)이 넘치는 까닭입니다.
기존 질서에 반항하려고 머리를 기릅니다.....라고 하실 분도 있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이발비 몇천 원이 아쉬워서 그냥 기르는 수도 있습니다.(ㅡ..ㅡ;)

‘수행' 중이냐고요? 설마요.
보통의 뮤지션은 ‘(세)속인’이지 ‘도인’이 아닙니다(뭐, 간혹 도인에 가까운 분들도 있지만요). 아마 다른 분야의 창작자들도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을 보면, 참 기묘한 느낌을 받습니다. 소위 ‘주류’에 대한 반발심이 많습니다. 뭐, 아무래도 롹의 정신이 반항이니까요. 물론 이 얘기가 그들이 단순히 ‘반항을 위한 반항’을 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들의 얘기를 듣다 보면, 어떤 경우에는 인문학적 성찰마저 느껴집니다.이럴 때는 그들이 세속인들과 동떨어진 부류들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아니, 사실 꽤 자주 그들의 세속적 욕망이 마치 잭팟을 터트리려는 도박꾼의 그것과 많이 닮아있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상업적인 ‘주류’음악을 경멸하면서도 기실 저들 역시 상업적 성공을 욕망합니다. 물론 이해할만 합니다. ‘상업적인 성공’이라는 것은 곧 많은 대중들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것인데, 이런 인정욕(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망)이 없었다면 애초에 음악을 하지도 않았을는지도 모릅니다. 하더라도 방구석에서 조용히 자기만족을 위한 음악 정도로 그쳤겠죠. 인정욕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 중의 하나라고,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예술가이자 경제학자인 한스 에빙 교수는 <왜 예술가는 가난해야 할까?>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예술세계의 빈곤현상에 대한 원인으로 우선 승자독식 현상을 들 수 있다. 잘못된 인식, 자만심, 위험감수 성향도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예술세계에는 승자독식 현상이 강하고, 이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즉, 예술시장의 구조적인 특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술세계로 몰려든다. 그 결과 예술시장에서는 과잉생산이 지속되고 평균소득은 더욱 낮아진다.

(...)
일반적으로 예술가들은 위험을 감수하려는 성향이 있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승자독식 시장에 특히 매력을 느낀다. 그래서 위험을 감수하려는 많은 젊은이들이 승자독식 현상이 강한 예술세계로 밀려오고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예술세계의 빈곤 현상은 심화되고 있다. 


예술가들의 딜레마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죠. "상업적 음악이라는 것은 비예술적인 것인가?" 그러면 십중팔구는 그렇다고 답변할 겁니다. 여기서 잠깐, '상업적'의 사전적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이렇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상업적 (商業的)

[관형사·명사] 상품을 사고파는 행위를 통하여 이익을 얻는. 또는 그런 것.


 
예술은 상업적 가치를 초월하는 신성한 거라는 믿음 때문에 많은 예술가들이 '상업적'인 것을 배격합니다. 여기서는 뮤지션에 한정해서 얘기해 보겠습니다. 많은 '진정한' 뮤지션들은 상업성을 불순한 것으로 보고 배격합니다. 그래서 얼터너티브 롹밴드인 Nirvana의 리더 커트 코베인이 자살한 원인으로 두 번째 앨범 <네버마인드>의 상업적 성공을 꼽기도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말도 안되는 얘기입니다. 상업적 성공을 커트 코베인이 꺼렸다면, 대체 왜 데뷔음반을 발매한 무명 레이블인 <서브팝 레코드>를 등지고 당대 최고의 음반사들 중 하나였던 <게펜 레코드>로 옮겨갔는지가 해명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롹커'들이 꼽는 명반들을 한 번 살펴보면, 상당 수가 소위 '대박'을 터뜨린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례로 핑크플로이드의 명반 <The Dark side of the moon>은 73년에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한 이래로 8년간 빌보드 차트에 머물러 있었고, AC/DC의 명반 <Back in Black>은 누적 판매량 5천500만 장으로, 마이클 잭슨의 <Thriller>음반에 이어 '단일 앨범 판매량' 순위에서 2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체 자본주의 음반 산업에 기생(이런 과격한 표현을 써서 송구한 마음이 듭니다만)하지 않은 음악계와 프로 뮤지션이 있을까요? 아마추어 동호회의 연주회는 그런 의미에서 순수합니다.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거개의 프로 뮤지션들이나 프로 뮤지션 지망생들은 탈속화되어 '신성한' 예술을 추구하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작품이 상업적으로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그들 거개는 '예술인'임과 동시에 '세속인'인 셈이지요.
 

(롹 음악이 ‘예술’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 이렇듯 ‘속(俗)’과 ‘예(藝)’의 모순대립적인 두 세계를 배회하는 이들을 보면, ‘속인’과 ‘예술인’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물을 묘사한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라는 소설이 생각납니다(강추입니다). 그 작품의 주인공인 토니오 크뢰거는 이렇게 말합니다.“삶을 대가로 희생하지 않은 채 에술이라는 월계수에서 잎사귀 하나를, 단 하나의 잎사귀라도 딸 수 있다고 생각하던 것은 잘못이지요.

이 ‘삶을 희생한 대가’가 반지하나 옥탑방, 또는 전기난로나 휴대용 가스버너 같은 따위들일까요? 토마스 만이 토니오 크뢰거의 입을 빌어 말한 것은 아마도 그 이상일 듯 합니다. 어쩌면 작가 서머싯 모옴이 <달과 6펜스>에서 묘사한 화가 스트릭랜드나, 헤르만 헤세가 <지와 사랑>에서 묘사한 조각가 골드문트의 삶이 그 모범답안이라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실적 인물 중에서는 그 유명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권총 자살로 생을 마치기 전까지 단 한 점만의 유화를 팔 수 있었습니다. 화구 구입과 생계를 위한 돈은 모두 동생 테오 반 고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죠. 그는 언젠가 동생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본질적인 것만 거론하자면, 어제 편지에서 말한대로 양치기 개는 바로 나 자신이고, 그 동물의 삶이 바로 나의 삶이다.(…) 나는 그 개의 길을 택했다는 걸 너에게 말해주고 싶다. 나는 개로 남아 있을 것이고, 가난할 것이고, 화가가 될 것이다. 또 나는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사람이 왜 평범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그건 세상이 명령하는대로 오늘은 이것에 따르고 내일은 다른 것에 맞추면서, 세상에 결코 반대하지 않고 다수의 의견에 따르기 때문이다.”

‘다수의 의견에 따르’지 않은 그의 삶의 귀결은 다음의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림은 나에게 건강을 잃은 앙상한 몸뚱아리만 남겨주었고, 내 머리는 박애주의자로 살아가기 위해 아주 돌아버렸지. 넌 어떠냐. 넌 내 생활을 위해 벌써 15만 프랑 가량의 돈을 썼다. 그런데….우리에게 남은 것은 하나도 없다.(…)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지냈겠지. 돈은 꼭 갚겠다. 안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



이제 토마스 만이 말한 ‘삶을 대가로 희생’한다는 것의 의미를 짐작할만 합니다. 물론 세상에는 반 고흐 같은 화가만 있는 건 아닙니다. 피카소나 달리는 예술가로서 호의호식했죠. 그러나 세상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가난하게 이리저리 부유하다가, (어느 찬송가 가사처럼)’이름 없이 빛도 없이' 생을 마치거나, 중도에 가던 길을 멈추고 다른 길—사람이 더 많이 밟은 길-로 급선회를 하고 맙니다. 아마도 이런 경우가 더 많겠죠. 목구멍이 포도청이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한때, 위에서 언급한 옥탑방에서 어떤 기타리스트 선배님과 함께 음악을 듣거나, 기타를 치고, 때로는 라면 안주에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길없는 막연한 인생을 얘기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인가, 그 선배님으로부터 간만에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태원에 있는 just blues라는 이름의 라이브 카페였죠. 몇몇 밴드의 블루스 연주를 듣고, 그 연주에 대한 나름의 평도 하고, 맥주도 마시고...재미있었던 시간이 그렇게 지나가버리고, 어느덧 헤어질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만 자리에서 일어날까요' 하고 말하려는데 그 선배님이 말문을 열었습니다.

   

“지얼아."

"네?"

"나 음악 접었다."

"......."

"그래서 요즘 전기 공사 자격증 시험 준비한다."

"그래도...형 실력이 너무 아까운데요..."

"실력은 무슨...무엇보다 먹고는 살아야지. 나중에 우리, 직장인 밴드나 결성하자.”

 





이제 <와이키키 브라더스> 얘기를 할 시간입니다.
이 영화에서 임순례 감독은 무명 악사의 인생이 단계적으로 어떻게 퇴행(?)하는지를 적나라하게 그립니다.
정말이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데, 이럴 바에는 차라리 날개조차 없었던 것이 좋았지 않았겠느냐고 반문하고 싶어집니다.

(이하, 스포일러 주의)

7인조로 활동하던 '와이키키 브라더스밴드는 
어느덧 세월과 생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베이스 기타조차 없는 4인조로 전락(?)합니다.
그러다가 색소폰 주자(오광록)도 떠나고 3인조로 불시착.
지방의 마을 잔치에서 푼돈을 받고 연주하면서 그럭저럭 생계를 이어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그들의 고향에 있는 '와이키키 호텔'의 전속 밴드로 발탁됩니다(학창 시절에 결성한 이 밴드의 이름은 바로 이 호텔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영화(?)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제일 먼저 드러머 ‘강수(황정민 분)'가 대마초의 환각과 현실의 남루함 사이에서 나자빠집니다.

강수가 자조적으로 말합니다. "야, 그래...다 너 가져라. 난 아무것도 필요없다. 여자도 필요없고 돈도 필요 없고 이젠 음악도 지겹다...."
그래서 강수는 결국 다른 을 갑니다.

 

이제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드럼 없는 2인조 밴드가 되었습니다.

주인공 ‘성우(이얼 분)'는 거리에서 우연히 과거에 자신이 다녔던 음악학원의 원장선생님과 조우합니다. 성우는 그 분을 드럼 연주자로서 팀에 합류시킵니다.

그러나 연로하신 스승님은 지나친 음주와 지병으로 그만 스테이지에서 쓰러지고 맙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다시 2인조가 되었습니다.

하루는 스승님께서 어느 외국 뮤지션의 음악을 들으시며 자조적으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하십니다.

 

"언제 들어도 예술이구만...이 친구하고 나하고는 42년생 동갑이거든. 근데 이 친구는 28살에 죽었고 나는 이 나이 되도록 잘 먹고 잘 산다는 게 한심하지 않아? 나 28살 때 뭐했는지 알아? 남편 월남 보내고 바람난 아줌마랑 캬바레에서…"

 

 

젊은 세월을 그 따위로 낭비했다는 자책보다는 "이 나이 되도록 잘 먹고 잘 산다"는 반어적 화법이 무엇보다 마음에 사무칩니다.


 


 

이제 영화는 종반에 다다릅니다.
키보드 연주자인 ‘정석(박원상 분)'도 어떤 사건에 휘말리는 통에 그만 '시즌 아웃되고 맙니다.
이제 주인공인 성우 혼자 남았습니다.
그는 적을 둔 어느 나이트 클럽의 스테이지에 주저앉아 고(故) 김현식의 <빗속의 연가>를 서글프게 부릅니다.
노래 참 구슬픕니다.
어쩌면 척박한 현실에서는 이런 류의 단조 조성의 노래에 화려한 화성을 수놓는 것조차 사치라고까지 여겨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은 버겁고, 버거운 삶을 짊어질 체력마저 없어 마음은 슬픈데 어찌 화려한 화성 같은 치장을 할 정신적 여유와 여력이 있을 수 있을까 싶습니다.

이들의 척박한 삶은 그들의 사춘기 시절과 너무나 대비됩니다.
한때는 롤링스톤즈 뺨 치는 롹 밴드를 꿈꾸었지요. 그러나 현실에서는 지방의 삼류 호텔에서도 쫓겨나 시골의 장터에서 '너훈아(짝퉁 나훈아)'의 노래 반주나 해주는 처지로 전락합니다.
주인공이 고등학생 시절에 좋아했던, 학교 축제에서 리타포드의 "아이 러브 롹앤롤"을 멋지게 불러 젖히던 그 여학생은 이젠 낡은 트럭을 몰며 야채 장사를 하는, 드센 아줌마로 변모해 있습니다. 
우연히 조우한 후, 강변에서 성우가 그녀에게 얘기합니다.

 "너 고등학생 때 좋아했던 음악 선생님이랑 결혼 안했어?"

 

그녀가 대답합니다.
 

 "뭘 결혼씩이나 하냐. 그냥 좋다가 마는 거지. 그래도 그 때가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였다."


그렇습니다. 주인공도 그 시절이 인생의 하이라이트였을 겁니다. 단지 그녀처럼 그냥 좋다가 말았어야 했습니다. 조금만 현명했더라면, 그래서 좋다가 말 수 있었다면 지금보다는 행복할 수 있었을까요?

학창 시절엔 정말 그러지 않습니까. 한때 레드제플린을 동경해서 깁슨의 레스폴 기타 가져보는게 소원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싸구려 ‘소리나 기타'나 치는 현실이지만 언젠가 깁슨이나 펜더 기타를 들고 전세계의 스테이지를 누비겠다는 야망이 재능의 여부와 현실적 처지에 상관없이 마음속에서 꿈틀거렸던...

(제 얘기 아닙니다…)

주인공 성우에게 그 야망은 현실에서 다행스럽게도 절반은 이루어지기는 합니다. ‘소리나 기타’ 대신 펜더 기타를 들고 어여쁜 아가씨가 있는 '룸'에 들어가는 현실로 말입니다.

단지 스테이지가 세계적이지 않고 국지적, 그것도 ‘졸라' 국지적이라는 것만 다를 뿐입니다....

이쯤되면 한 때의 자부심이요, 찬란한 영광이었던 '뮤지션'은 이젠 더 이상 권하고 싶지 않은 비정규고용직일 뿐입니다.

 

"올갠 좀 제대로 가르쳐 주세요."

".....이건 날 샌 직업이야. 그러지 말고 다른 거 배워. 포크레인이나 자동차 정비나...그런 게 좋잖아?"

 

직장에서 해고된 한 친구가 ‘성우'에게 묻습니다.

 

"성우야...행복하냐? 우리들 중에 지 하고 싶은 일 하며 사는 거 너 밖에 없잖아. 그렇게 좋아하던 음악 하고 사니까 행복하냐구?"

 

버스기사로 전업한 강수(황정민 분)가 버스 안에서 키보드 연주하는 친구와 통화하다가 슬픔을 공유하고서는 서글프게 웁니다. 황당해하는 승객들 사이에서 갓난아기가 또한 따라 웁니다.

어쩌면…이 아기 또한 먼 훗날 유사한 성격의 슬픔을 겪게 될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제 혼자 남게 된 성우는 술집의 악사로서 단란주점을 전전하다가, 결국 룸싸롱의 '오부리 맨'로 전락합니다. 제 선배님의 견해에 따르면, '사람이 할 일이 못 된다’는 그 오부리 연주자로서 말입니다.

때로는 천민 자본주의의 적자인 소위 졸부들이 그곳에서 호스티스들과 한판 누드쇼를 벌이기도 합니다. 직업을 ‘기능'으로 파악하지 않고 ‘지위'로 파악하는 걸 너무나 당연시하는 그 졸부들은 성우에게도 자기들과 똑같이 벌거벗으라고 ‘명합니다.’

 강압에 못 이겨 결국 벌거벗은 채로 초라하게 기타를 연주하는 성우. 모니터의 영상에는 해변가에서 자유로이 뛰어놀던, 인생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청소년 시절이 오버랩됩니다.

임순례 감독님. 너무합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습니다.

 

'가장 불행한 일은....불행한 현재에 찬란했던 과거를 돌이키는 것이다'

 

몽테뉴의 말이었나요? 누가 한 말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참으로 명언입니다.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에서 주인공 ‘영호(설경구 분)'가 그랬던 것처럼, 성우 역시 그 잔혹한 진실 앞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습니다.

문득 <박하사탕>에서 '영호'의 물음이 떠오릅니다.

 

"근데 너 정말... 삶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니?"

 

영호도 과거에는 이름 모를 들꽃을 보며 눈물을 글썽이던 순수한 청년이었지만, 점차 삶에 오염되어가다가, 결국에는 기차길 위에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죠.

영화가 보여주는 이러한 진실은 참으로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Seasons in the sun>이라는 노래를 가장 슬픈 노래 중 하나로 꼽습니다. 노랫말처럼, 찬란한 과거와 비천한 현실의 대비는 항상 처연한 슬픔으로 다가옵니다.


 (원곡은 테리 잭스의 곡입니다)




Goodbye to you my trusted friend 
 We've known each other since we were nine or ten 
 Together we've climbed hills and trees 
 Learned of love and ABC's 
 Skinned our hearts and skinned our knees 

 나의 믿음직스런 친구여 안녕 
 우린 서로 잘 알고 있지 
 9살인가 10살 이후로 쭉 
 언덕과 나무를 함께 오르기도 했고 
 사랑과 글도 배웠지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했고 
 무릎도 까지면서 

Goodbye my friend it's hard to die 
 When all the birds are singing in the sky 
 Now that spring is in the air 
 Pretty girls are everywhere 
 Think of me and I'll be there 

 안녕 내 친구여 정말 죽기엔 너무 힘들어 
 하늘에선 새들이 노래하고 

 예쁜 소녀들이 어디에나 나다니고 

 봄기운이 감돌면 
 날 생각해 그럼 내가 곁에 있을게

We had joy we had fun we had seasons in the sun 
 But the hills that we climbed were just seasons out of time 

 즐겁고 재미있게 
 햇살 고운 계절을 만끽했지 
 하지만 우리가 오르던 그 언덕엔 
 계절이 지나가고 

Goodbye Papa please pray for me 
 I was the black sheep of the family 
 You tried to teach me right from wrong 
 Too much wine and too much song 
 Wonder how I got along 

 안녕히 계세요 아빠 
 날 위해 기도해 줘요 
 난 가족들의 말썽꾼이죠 
 당신은 날 올바르게 가르치려 노력했어요 
 폭음과 과도한 노래로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놀라울 따름이죠 

Goodbye papa it's hard to die 
 When all the birds are singing in the sky 
 Now that the spring is in the air 
 Little children everywhere 
 When you see them I'll be there 

 안녕히 계세요 아빠 죽기 너무 힘들군요 
 하늘에선 새들이 노래하고 

 봄기운이 감돌면 

 꼬마들이 어디에나 나다니고 

 그 아이들이 보이거든 제가 곁에 있을 거예요 


We had joy we had fun we had seasons in the sun 
 But the wine and the song like the seasons have all gone 
 We had joy we had fun we had seasons in the sun 
 But the wine and the song like the seasons have all gone 

 즐겁고 재미있게 
 햇살 고운 계절을 만끽했지
 하지만 와인과 노래들은 
 계절이 지나간 것과 같이 사라져 버리고 

Goodbye Michelle my little one 
 You gave me love and helped me find the sun 
 And every time that I was down 
 You would always come around 
 And get my feet back on the ground 

 안녕 미셸, 내 꼬마 친구 
 넌 내게 사랑을 주었지 
 해를 발견하도록 날 도와주기도 했고 
 내가 축 처져 있을 때마다 
 항상 내게 와서는 날 일으켜 세워주었지 

Goodbye Michelle it's hard to die 
 When all the birds are singing in the sky 
 Now that the spring is in the air 
 With the flowers everywhere 
 I wish that we could both be there 

 안녕 미셸 죽기 너무 힘들어 
 하늘에선 새들이 노래하고 
 봄기운이 감돌면 
 어디에나 꽃들이 피어있고   

 우리 함께 거기에 있다면 좋을 텐데


We had joy we had fun we had seasons in the sun 
 But the hills that we climbed were just seasons out of time 

 즐겁고 재미있게 
 햇살 고운 계절을 만끽했지 
 하지만 우리가 오르던 그 언덕엔 
 계절이 지나가고 

We had joy we had fun we had seasons in the sun 
 But the wine and the song like the seasons have all gone

 즐겁고 재미있게 
 햇살 고운 계절을 만끽했지
 하지만 와인과 노래들은 
 계절이 지나간 것과 같이 사라져 버리고





3.

다시 처음의 얘기로 돌아가 봅니다. 저는 제 학생에게 이렇게 말했었습니다. "그러다보면 학생 시절에는, 적어도 마인드 하나만큼은 '연주가의 손’이라고 자부했던 것이, 지금은 그냥 '학원용 손’으로 정체되어버렸거든. 어릴 때부터 한 거라고는 이거 밖에 없으니 다른 거 하기도 그렇고...그냥 완전히 타성에 젖어버리는 거지. 가끔 술자리에서 '옛날엔 정말 잘 쳤는데…’하는 따위의 타령이나 하면서.”

 

아, 이제는 세상 사람들이 하등 쓸모없다고 판단하는, '옛날에는 한때 잘 나갔었는데’하는 류의 자랑 반 자조 반의 그런 이야기조차 따뜻하게 들어줄 수 있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보고 나면 말이죠.

 

저는 위대하고 악마적인 미(美)의 좁은 길에서 모험을 하고 ‘인간’을 멸시하는, 저 교만하고 냉정한 예술가들에게 감탄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부러워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문학 애호가를 진정한 시인으로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인간적인 것, 생명있는 것, 그리고 평범한 것에 대한 저의 시민적 애정, 바로 그것이니까요.

                           —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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